5월 15일은 스승의 날이다.
몇 번의 변천을 거쳐 지난 1965년부터 매년 이날을 기념일로 정해오고 있다. 스승의 날의 유래와 변천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본 시리즈의 취지상 독자들의 검색에 맡기겠다.
참고로 스승의 날은 법정기념일이지만 공휴일은 아니다. 법정기념일, 법정공휴일 그리고 국경일의 복잡다단한 관계에 대해선, 마찬가지로 각자의 검색에 맡기며 간단한 관계도 한 장만 첨부한다.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지정한 배경이 재밌다. 우리민족의 가장 큰 스승 세종대왕의 탄신일이라는 것이 그 이유다. 그렇다면 세종은 군주이면서 스승이시니 군사일체(君師一體)의 화신인 셈이다.
스승의 날을 기념하여 군사일체의 화신, 세종대왕의 기념관을 찾아가보겠다. 청량리 홍릉의 세종대왕기념관이나 여주 영릉의 세종대왕역사문화관도 좋지만, 대왕께서 거대한 풍채로 좌정해 계시는 광화문광장의 세종이야기를 선택했다. 눈에 확 띄니까.
세종이야기.
이 기념관은 특이하게도 ‘이야기’가 붙는다.
이게 뭘까? 박물관의 창에서 소개하는 곳이니 당연히 박물관이겠지만 이름만 들어서는 아마도 어린이용 도서나 극화를 생각하기 쉬울 거라고 본다.
우리가 통상 박물관이라고 할 때 박물관, 미술관, 과학관, 기념관, 자료관, 사료관, 전시관, 교육관, 민속관 등을 모두 아울러 부르는 이름인데, 뒤에 ‘이야기’가 붙는 박물관은 세종이야기와 충무공이야기가 유이(唯二)하다. 그럼 왜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
관람객 접근 방식이 일반 박물관과 다르기 때문이다. 세종이야기가 위치한 곳은 광화문광장이 조성되기 전에 지하보차도(차량이 통행하는 지하차도 양옆으로 보행자 통로가 함께 있는 지하도로)로 이용됐던 곳이다. 지금은 차가 안 다니고 세종이야기가 조성돼 있지만 기본 구조는 그때와 같다. 차와 사람이 통행하던 공간이 바뀌어 박물관이 된 것이다. 지금도 KT 쪽 출입구와 세종문화회관 쪽 출입구를 통해 광화문광장을 지하로 건널 수 있는데, 이 길을 택한다면 통행이 곧 전시 관람이 되는 셈이다.
그러니까 이곳은 다른 박물관처럼 일부러 맘먹고 가는 곳이 아니라 광화문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길을 건너며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박물관이다. 거창하게 ‘전시 관람’이라기보다는 ‘이야기 듣기’가 적당하지 않았을까?
또 한 가지를 꼽자면 세종대왕이 역사 속 위인 중에 우리네 삶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분이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서는 대왕께서 창제한 한글을 쓰고 있고, 지갑 속 만원권 지폐에도 대왕의 영정이 그려져 있다. 또한 지금의 우리나라 지도는 세종시대에 정해진 영역이다.
새삼스럽게 책을 뒤지거나 공부를 해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늘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세종대왕, 그러므로 엄숙한 ‘세종기념관’이 아니라 친근한 ‘세종이야기’가 더 가깝다고 판단한 것 같다.
전시 공간은 예전에 지하차도였던 곳이라서 천장이 낮다. 대체로 박물관은 다른 공간에 비해 천장이 훨씬 높은 경우가 많다보니 세종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더더욱 답답하게 느껴진다. 참고로 국립중앙박물관의 천장 높이는 7미터 이상을 헤아린다.
그래서 천장에 반자를 두지 않고 흔히 공조 시설이라고 부르는 배관을 그대로 드러냈다. 아마도 일반 건물처럼 천장에 반자를 댔다면 높이가 2미터 될까 말까 했을 거다. 그러니 배관시설을 노출해서라도 천장 높이를 확보한 셈인데 고육지책이기도 했지만 세종이야기가 만들어질 당시(2009년)의 유행이기도 했다. 요즘도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카페나 클럽을 가보면 이런 노출 천장을 흔히 확인할 수 있다.
높이를 확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보니 많이 늘어놓기보다는 핵심 전시물만 밀도 있게 표현하며 공간을 연출했다. 상하 방향의 공간 제한을 좌우 방향의 시야 확보로 보완한 것이다.
거기에 일부 공간은 천장을 바리솔로 마감함으로써 공간이 높아보이게끔 시각적인 확장감을 주었다. 일종의 데칼코마니 효과이다.
전시는 한글 창제, 과학 분야, 음악 분야, 군사 정책, 민본 사상 등 세종의 업적을 분야별로 구분해 놓고 있으며, 중심 전시 내용은 역시 한글 창제이다.
세종을 흔히 외교, 국방, 교육, 문화예술, 과학, 생업(농업) 등 국가가 지향하는 모든 업적을 이루어낸 천재 정치가라고 평한다. 그의 업적을 열거하기엔 지면이 모자라고 박물관이 좁다.
한글 창제, 해시계‧물시계‧천문기구‧측우기‧수표‧금속활자‧석빙고‧신기전 제작, 집현전 설치 후 우리 실정에 맞는 수많은 도서(치평요람‧역대병요‧고려사‧고려사절요‧효행록‧삼강행실도‧팔도지리지‧향약집성방‧의방유취‧훈민정음해례‧용비어천가‧동국정운) 편찬, 아악 정리, 남으로 대마도 정벌, 북으로 4군 6진 개척…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을 수가 있구나!’
나라를 책임졌던 동서고금의 수많은 집권자 중에 능력과 노력과 결과 면에서 이토록 완벽한 사람이 또 있을 수가 있을까? 세종은 그저 놀랍고 존경스럽고 고마운 분이다. 그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단 하나, 본인의 몸 관리에 소홀했다는 점이다. 책읽기만을 좋아하고 육류를 즐겼던 세종은 소갈(당뇨) 합병증으로 말년에는 눈앞에 있는 사람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눈에 보이는 수많은 성과물 외에도 세종이 돋보이는 지점은 바로 애민정신이다. 어려운 한자를 못 읽는 백성과 소통하기 위해 한글을 창제한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며 노비에게 130일의 출산휴가, 남편에게는 30일의 육아휴가를 주고, 세금제도를 바꾸는 것에 대해 무려 172,000명을 대상으로 5개월간 여론조사를 실시하고, 죄인을 가둔 옥사를 여름엔 통풍, 겨울엔 난방이 되게끔 개선하는 등의 치적을 이룬 것은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인식했던 혁신적인 위정자의 모습이었다. 세종의 시대를 한 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과학과 복지 정책이 愛民이라는 뚜렷한 통치철학과 조화를 이뤄 우리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번성한 시대”
세종이야기 조성과 관련된 뒷얘기가 재밌다. 세종이야기가 위치한 광화문광장은 오세훈 전임 서울시장의 최대 업적이자 국내 건축 전문가들이 뽑은 최악의 건축 1위라는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 세계 최대의 교통섬(?)이라는 타이틀은 덤이다.
당시 서울시에서는 광화문대로 한 가운데를 막아 광장을 조성하기로 결정(국가상징가로 조성 사업)하면서 이 광장의 테마를 ‘세종’으로 정했다. 광장 서편에 세종문화회관이 있고, 세종 탄신지(유력하게 추정) 준수방 터가 길 건너편 통인동에 있고, 문화의 세기를 맞아 세종리더십에 대한 관심까지 고조돼 있던 터라(드라마《대왕세종》도 한몫을 했다)… 새로 조성될 광장 한 가운데에 세종대왕 동상을 설치하는 계획은 큰 이견 없이 확정(2009년 초)됐다. 그러면서 그 아래쪽 지하보차도에는 (가칭)세종대왕 기념공간을 조성하기로 결정된다.
몇 달 뒤 전시업체들 간의 경쟁공모가 있었다. 사업설명회에 참석했던 나의 불길한 예감 ‘아! 개관일은 10월 9일이겠구나!’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업체 선정이 7월이고 그때부터 10월 9일까지는 채 100일도 안 남았지만 공무원의 날짜 감각이라면 개관은 ‘반드시’ 한글날에 해야 했다. 비유하자면 칼국수를 만들어오라면서 컵라면 끓이는 시간만큼만 준 셈이다. 조세제도를 바꾸는 데에도 5개월간의 여론조사 후 두 차례 시범실시를 시행하며 14년간의 준비 기간을 거치게 했던 세종께서 아셨다면, 분명 신중하게 준비해서 내년 10월 9일에 개관하라는 불호령을 내렸을 것이다.
어쨌든 죽을 동 살 동 100일의 시간은 지났고, 2009년 10월 9일 한글날, 세종대왕 동상 제막과 함께 세종이야기는 성대하게 열렸다.
그리고 세종이야기에 대한 관람객들의 반응이 당초 예상보다 훨씬 좋았다. 여기에 고무된 서울시는 그 옆의 공간을 충무공이야기로 조성하기로 결정한다.
또 한 번의 슬픈 예감. ‘아! 개관일은 4월 28일이구나!’
역시 2010년 4월 28일 충무공탄신일에 맞추어 충무공이야기도 어김없이 개관됐다. 그래서 지금은 두 이야기를 세종문화회관에서 함께 관리하고 있다.
본래 이 자리는 충무공이야기의 공간이 아니었다. 광화문광장 일대가 세종벨트가 되면 충무공동상은 충무로로 이전하여 별도의 충무공벨트를 조성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충무공동상은 광화문네거리의 상징이라는 의견이 꽤나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충무공께서는 백성들의 만류로 광화문을 떠나지 못하게 되었고, 세종대왕과 충무공의 어색한 공존은 이렇게 시작됐다.
세종동상과 충무공동상은 서로 비율도 맞지 않고 조형물의 느낌도 다르다.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1, 2위라는 점 말고는 딱히 두 분을 한 데 엮을 만한 스토리가 궁한데도, 충무공이 우뚝 서고 그 뒤에 세종대왕이 앉아 계신 이 그림은 어느새 우리 눈에 억지로 익숙해지고 있다.
지상에는 두 분의 동상, 지하에는 두 분의 박물관.
처음엔 많이 어색했지만 성공한 이종교배처럼 광화문광장에서 세종이야기와 충무공이야기를 연이어 관람하는 것도 어느덧 이곳의 색다른 매력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앞으로 다문화 속에서 살아가야 할 우리 후손들에게 세종과 충무공께서는 지금도 몸소 ‘광화문의 콜라보’를 무언의 교훈으로 시전하시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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