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전시한 박물관인지 바로 접수가 되시는지?
이름만 들어서는 정체를 잘 모르겠다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
해외 이주의 역사, 곧 이민사(移民史)는 우리가 일상생활 중에 입에 올릴 일이 거의 없는 단어이다. 평소에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별 관심거리가 아니라는 얘기다.
지금까지는 관심이 없었다 해도 해외동포의 숫자가 남북한을 합한 한반도 인구의 10분의 1에 육박하는 오늘, 한국인의 해외 이주는 어디서 어떤 시작이 있었으며 어떤 경과를 거쳐 왔는지 이제 궁금할 때도 됐다고 본다. 궁금하면 인천 월미도로 가면 된다.

한국인 이민의 역사는 수천 년을 헤아리지만 나라에서 인정한 공식 이민은 1903년 1월 호놀룰루에 도착한 사람들을 최초라고 기록한다.
이들의 이야기, 그리고 64차까지 이어진 하와이 이민자들의 이야기, 이밖에 하와이와 미주 이외 지역의 이민 이야기를 전시한 박물관이 바로 한국이민사박물관이다.
전시관 단독 건물로서 1, 2층 2개 층에 걸쳐 4개 전시실로 구성돼 있고 지하에는 별도의 영상관이 마련돼 있다. 로비를 거쳐 2층으로 올라가서 제1전시실-‘미지의 세계로’부터 관람을 시작한다.
제물포항을 출발하여 나가사키항을 경유하여 호놀룰루에 도착한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전시해놓았다. 일본 선박 겐카이마루호를 타고 제물포항을 출발한 사람은 121명, 경유지 나가사키에서 신체검사를 거쳐 미국 국적 갤릭호로 갈아타고 호놀룰루에 도착한 사람이 102명, 하와이 보건당국의 질병 검사 결과 최종 상륙허가를 받은 사람이 86명. 이 중에 현지 도착자 102명을 최초의 이민자로 본다. 이들의 이민 과정을 보도한 당시의 황성신문이 벽면에 걸려 있다.


기사의 한자를 모두 한글로 바꿨는데도 여전히 고문(古文)에 가까운지라 해석이 필요하다. 인항은 인천항(제물포항)을 말하며, 포와는 하와이의 한자 표기이다. 미인 떼슈라 씨는 미국인 Deshler(데슐러)를 말한다.




하외이 이민은 꽤나 성황을 이룬다. 1905년까지 약 3년간 64회에 걸쳐 총 7,415명이 조선(대한제국)을 떠나 하와이에 정착한다.
박물관에서는 성황의 이유를 국내 상황, 하와이 정세, 이민의 주선, 이렇게 3가지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각각 공급자, 수요자, 채널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먼저 공급자 측면, 국내 상황이다. 계속되는 가뭄, 서구 열강의 이권경쟁, 크고 작은 전쟁과 민란 등 불안하고 먹고 살기 힘든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고픈 욕구가 팽배해있었다. ‘확 이민이나 가버릴까 보다!’ 하는 여건이 당시 조선사회에 갖춰져 있었던 셈이다.
다음은 하와이 정세, 수요자 측면이다. 외국인 노동자가 필요했던 하와이의 형편을 말하고 있다. 20세기를 전후하여 당시 미국 본토에서는 설탕 수요가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이에 맞추어 하와이에는 대규모 사탕수수농장들이 생겨난다. 초기에 원주민들이 감당하던 노동력이 한계에 부딪히자 중국과 일본 이민자들의 노동력이 유입되었다. 중국인은 중국인배척법 탓에, 일본인은 조직적인 노동운동 탓에 고용을 꺼리게 되고 대안으로 떠오른 선택지가 바로 조선인 노동자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중국인배척법(Chinese exclusion act)이다. 지금 상식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법안이지만, 1882년 미국 하원을 통과하여 1943년 폐지될 때까지 무려 60여 년간이나 존속됐다. 늘어나는 중국이민자들에 대한 두려움 탓에 제정된 어처구니없는 인종차별이었다.
다음으로 수요와 공급을 잇는 채널 측면에서 바라보면 알렌과 데쉴러가 눈에 띈다. 알렌은 역사책에 자주 등장하는 구한말 미국공사로서 고종황제의 신망이 깊었다고 한다. 친구의 양아들인 데쉴러(위에서 언급한 한국명 떼슈라 씨)가 조선에서 하와이 이민사업을 벌이는 데 있어서 알렌은 강력한 후원자 역할을 했다. 데쉴러가 설립한 동서개발회사(East-West Development Co.)와 데쉴러은행은 대한제국 정부의 후원을 업은, 하와이 이민의 독점사업자였던 셈이다.
이런 3박자를 바탕으로 하와이 이민은 차츰 성공적으로 정착하게 된다. 하와이 농장주가 보기에 근면성 면에서 한국인만 한 노동자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와이 이민은 결코 아메리칸드림이 아니었다. 고된 노동과 저임금(본토 노동자의 10분의 1 임금), 인종차별과 고국에 대한 향수에 시달리게 된다. 이런 여건 속에서도 교민단체가 조직되어 나름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훗날에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인적, 물적으로 후원하는 수준까지 성장한다.
이런 내용들이 제2전시실 ‘극복과 정착’ 존에 전시돼 있다. 현지의 한국인 주택이 연출돼 있고 마당에는 된장이 담긴 항아리가 놓여있다.

한인회가 세대를 이어서 유지되려면 현지의 남녀비율이 맞아야 하지만 당시 하와이의 상황은 남성이 여성보다 무려 10배가 많은 극도의 불균형 상태여서 한국인 배우자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생겨난 웃지 못 할 풍속이 바로 사진신부이다. 하와이에 사는 남자의, 언제 적 것인지도 모르는 사진만 보고 국내에서 결혼 이민을 출발한 여성들을 사진신부라고 불렀다. 1910년부터 1924년까지 중매장이를 통해서 약 700명 정도의 사진신부들이 결혼을 위해 하와이로 건너갔다.
이렇게 이역만리에서 맺어진 신랑신부의 평균 나이 차이는 15년이었다. 신부의 억장은 무너졌겠지만 처음부터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던 부작용이기도 했다. 요즘처럼 뽀샵을 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10년 전에 찍은 사진일 수도 있고 타고난 동안일 수도 있고 더러는 다른 사람의 사진일 수도 있었다. 문제는, 속았다고(?) 느낀 순간 도로 무르기가 쉽지 않았다는 거다.
사진신부가 물론 국제결혼은 아니었어도 오늘날 우리가 처한 농촌총각 배우자 찾기와 유사한 점들이 묘하게 겹쳐 보인다.
이어지는 전시 코너에는 이들의 생활터전이었던 사탕수수밭과 신학문을 익혔던 교실이 재연돼 있고 이민생활을 증명하는 각종 전시물이 진열돼 있다. 사진 자료, 호롱불, 양은 도시락통, 국기, 저울, 물통, 타자기 등


이민 2세대 이야기도 등장한다. 그곳에서 태어났기에 현지의 언어와 문화에는 익숙했지만 정체성에 관해서는 혼란을 겪으며 미국사회에 정착한 이들의 이야기와 그 뒤에 입양자나 전쟁고아의 신분으로 영입된 새로운 구성원들의 사연이 적혀있다. 재미있는 것은 1990년대부터, 한국에 기러기아빠를 남겨둔 채 이주한 가족들을 새로운 유형의 이민으로 분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2층의 1, 2전시실은 하와이 이민을 중심으로 한 미주 이민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
1층으로 내려오면 ‘미주 이외 지역’의 이민사를 살펴 볼 수 있다. 멕시코 이민자와 쿠바의 코레아노 이야기로부터 전시가 시작된다. 이들 중미 지역 이민의 특징은 초기 이민사회가 교민단체로 이어지지 못하고 혼혈을 통해 현지에 흡수됐다는 점이다. 현재 멕시코의 한인은 15,000명 정도로 추산한다. 특히 쿠바의 경우엔 1959년 쿠바혁명 이후 미주 한인회 등 주변국의 주류 한인회와는 완전히 단절됐다고 한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등 남미 이민사회도 각 나라별 부스 형태로 꾸며 놓았다. 이중 까레이스키의 이야기가 눈에 띄는데 구 소련에서 강제이주된 우즈베키스탄의 20만, 카자흐스탄의 10만 고려인에 대해 전시하고 있다.
전시의 마지막 코너에서는 인천의 인하대학교를 소개하고 있다.
퀴즈. 인하대학교는 하와이 이민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지난 1954년에 건립한 학교이다. 그렇다면 학교의 이름 ‘인하’는 무슨 뜻일까? 힌트는 연세대. 정답은 이 글의 맨 마지막에…

다른 박물관과 비교해서 한국이민사박물관이 지닌 가장 차별적인 강점은 전시 소재이다. ‘이민사’가 전시 소재로서 매력적인 것은 일단 독특하다는 점이다.
‘고국을 떠나 해외에 나가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것은 그동안 우리의 관심 밖에 있었던 영역이다. 우리는 지난 일백년간 외세의 핍박에 우리 내부의 갈등에 잘 살기 위한 몸부림에, 시쳇말로 ‘죽고 싶어도 죽을 여유조차 없이’ 살아오느라 우리 곁에서 누가 한국을 떠나갔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때가 되었다. 타의에 따라 자의에 따라 고국을 떠난 사람들이 궁금해질 때도 되었다. 이민사박물관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박물관이 필요했던 또 다른 이유는, 이민사가 해외 동포들의 지대한 관심 분야이기 때문이다. 내 부모가 혹은 그보다 먼 조상들이 떠나온 곳에 대한 향수는 대단히 원초적이다. ‘한민족의 원류를 찾아서’와 같은 TV 프로그램이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따라서 전 세계 한인 이민자들에게는 그들의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이민자의 성지’가 필요했다. 이민자들 마음속의 귀향지, 곧 디아스포라의 상징이 이민사박물관이다.
마지막으로, ‘이민사’는 인천의 도시 정체성에 정확히 부합한다는 점이다. 한국 이민의 역사는 100년 전 (일본을 거쳐) 하와이로 향했던 102명의 이민자로부터 시작됐는데 이들이 제물포항에서 출발했으므로 이민사는 인천 역사의 일부라고 볼 수 있다. 인천은 현재 우리나라 육해공 교통의 중심지로서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도시 이미지가 해외 이민의 긍정적인 측면과도 닿아 있다. 해외 이민이 시작된 지가 100년이 넘었고 재외동포가 750만 명에 육박하지만 국내에 한국 이민의 역사를 다룬 박물관은 이곳이 유일하다. ‘이민’이라는 소재가 인천 이외의 다른 도시와는 접점이 없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도시 정체성에 부합하는 박물관’. 이런 박물관이 의외로 흔치 않다.
그러므로 한국이민사박물관은 인천이라는 거대도시의 정체성과도 닿아있는 독특한 형태의 도시역사 박물관인 것이다.

퀴즈 정답: 인하는 인천(仁)과 하와이(荷)를 합한 말이다. 연희(延)+세브란스(世)의 연세처럼 한자와 외래어를 합한 특이한 방식의 조어로서, 연세(1957)보다 인하(1954)에 먼저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