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의 창(네이버 연재)

이영춘가옥과 시마타니금고

kocopy 2025. 3. 9. 09:26

군산의 구도심인 신흥동, 월명동, 장미동 일대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지주들이 모여 살던 부촌으로서 이때의 식민지 흔적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오늘날은 모두 근대문화유적이 되어 군산의 관광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지난주에 소개한 ‘지붕 없는 박물관 – 군산’편의 요약이다.
여기서 내륙 쪽으로 조금 떨어진 군산시 외곽에, 비슷한 성격의 적산가옥 한 채와 특이한 금고 한 동이 있어서 소개하려고 한다. 바로 이영춘가옥과 시마타니금고다.

군산 지역은 조선 최대의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이 일본으로 반출되던 곳이었다. 이에 따라 막대한 부를 축적한 지주, 농장주들이 많이 살았고 그들의 대단위 가옥이나 별장 또한 많았다고 한다. 호남평야 최대의 농장인 구마모토농장의 별장이 바로 이영춘가옥이다.
구마모토농장은 정읍, 김제 등 전라북도 5개 군에 걸쳐 농장 1,200만 평, 소작인 3천여 가구를 거느린 대농장이었다. 일제 패망 후 적산가옥이 된 구마모토가옥은 그후 농장 산하 자혜진료소장 이영춘 박사가 1980년 돌아가실 때까지 거주했다고 한다.
가옥 내부를 전시 시설로 꾸며 놓고 본 가옥의 건축적 의미와 이영춘 박사의 의료봉사 활동, 그리고 일제강점기 한국 농촌의 현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군산간호대학을 들어서면 오른편 언덕에 이영춘가옥이 보인다.

전시 내용 소개에 앞서 가옥의 내외부를 먼저 둘러보자.
군산간호대학을 들어서면 야트막한 언덕 상부에 이국적인 가옥 한 채가 바로 눈에 들어온다. 처음 보는데도 왠지 낯설지가 않다 싶으면 십중팔구 이 건물을 드라마에서 본 거다. 아마도 드라마《모래시계》빙점야인시대등을 통해 눈에 익었을 게다.
이런 익숙함을 빼더라도 건물 자체가 참 예쁘다. 굳이 건축의 균형미나 색감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보편적으로 누구에게나 그렇게 보일 거라 생각된다.

진입부에서 바라본 이영춘가옥

예쁘긴 한데 이게 도대체 어느 나라 건물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한옥도 아니고 딱히 일본집도 아니고 유럽풍 목조주택의 느낌도 있고…
실내만 해도 전체적으로는 일본식 가옥구조를 보여주면서 한식 온돌방에 서양식 벽난로나 샹들리에까지 갖추고 있고…
좋은 건 다 갖다 붙인 한식, 양식, 일식 복합형 가옥이다. 좋은 것들만 모아 놓으면 그 합은 대체로 실망스러운 경우가 많지만, 이 집만큼은 완성도 높은 조화로운 저택으로 남았다.
비결은 돈이다. 1920년대 당시 조선총독 관저와 맞먹는 규모의 건축비가 들어갔을 정도로 최고의 건축자재만을 모았다. 건물 마감재는 백두산에서 베어온 낙엽송, 지붕은 청석 돌판, 거실 바닥재는 티크목, 창에는 영국제 스테인드글라스, 천장에는 샹들리에, 심지어 응접실의 가죽의자는 고종황제 일가가 사용하던 것을 가져다 놓았다고 한다. 본채도 아닌 별장에 이 많은 건축비를 들였으니 당시 집주인 구마모토가 조선최대의 농장주였다는 말이 과장은 아닌 듯하다.

창밖으로 보이는 벽면 마감재는 백두산 낙엽송이다.
기와를 대신해 얹은 청석 돌판
천장에는 호화저택의 상징 샹들리에가 걸려 있다.

집안으로 들어가 보자. 실내화로 갈아 신고 마루로 올라서면 이곳에 상주하는 해설사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해설을 요청하면 이영춘 박사에 관한 상세한 내용을 전해들을 수 있다.
가옥 내부는 다다미방, 한식 온돌방, 서재, 거실, 부엌, 욕실, 화장실, 그리고 이들을 연결하는 일본식 마루로 구성돼 있는데 지금은 전시관으로 사용되다보니 생활가옥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전달한다.

전시는 크게 이영춘 박사에 대한 부분과 이영춘가옥에 대한 부분으로 나뉜다.
앞서 언급한 이영춘가옥 내외부 마감에 관한 이야기와 더불어 이 건물의 건축사적인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읽어도 이해가 쉽지 않은 부분이 많아서 패널 내용을 그대로 옮겨 왔다.

 

‘각면을 밖으로 돌출시켜 실제보다 크게 보이도록 건물을 설계하였고, 각 방향의 디자인을 다르면서도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다. 건물에서 떨어진 곳과 북쪽에는 향나무, 모과나무 등 키가 큰 나무를 심고, 정면과 건물 가까이에는 작은 나무들을 배치하여 운치있는 풍광을 조성하였다.
남쪽과 서쪽에 출입구를 두되 서쪽은 그 방향을 90도로 꺾음으로써 건물의 좌향과 주출입구를 남향시키면서도 서쪽 현관을 통해 편의를 도모하는 한편 외부에 직접 노출되는 것을 막는 이중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좋은 건물이라는 뜻일 게다.

군산간호대학 구내의 쌍천 이영춘 박사 흉상

이제 이영춘 박사에 대한 전시 내용이다.
일제 패망 후 농장주 구마모토는 재산을 챙겨 일본으로 도망갔고, 적산가옥이 된 구마모토가옥은 농장 산하의 자혜진료소장 이영춘 박사가 거주하면서 이때부터 평생을 질병 퇴치 활동 등 농촌 의료봉사에 매진했다고 한다. 그래서 선생은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린다.
1903년 평남 용강에서 태어나 평양고보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하고 구마모토농장 산하의 자혜진료소장으로 내려와 1980년 돌아가실 때까지의 활동 내용이 연표로 정리돼 있다. 그리고 이영춘하면 빼놓을 수 없는 기관, 농촌위생연구소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다. 이때 연구소 산하 기관으로 설립된 고등위생기술원양성소가 오늘날의 군산간호대학교이다.

일본식 창호 마감

전시 구성은 아주 단순하다.
패널로 빼곡히 설명글을 적어 걸고 벽면 진열장에는 선생이 사용하던 유물들, 즉 의복, 모자, 안경, 서책류 등을 전시해 놓았다.
전시 내용을 살피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가옥의 위, 아래, 벽면을 살펴보고 창을 통해 가옥 외부를 조망하면서 풍경이 전달하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감상하실 것을 권해드린다.
이런 집들은 상대적인 희소성이 있기 때문에 언젠가 또다시 대작 드라마나 영화 등에서 주요 장면으로 다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때 ‘어 저거 군산 이영춘가옥인데’ 하면서 알아보는 것도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또 다른 묘미가 아니겠나?

패널과 진열장으로 꾸민 가장 단순한 형태의 전시실 구성
이영춘 박사의 생전 의복

군산 적산가옥의 또 다른 볼거리, 시마타니금고는 이영춘가옥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에 있다. 시마타니금고의 정확한 문화재 명칭은 ‘군산 발산리 구.일본인 농장 귀중품 창고(등록문화재 제182호)’이다. 금고라고 해서 책상 크기만 한 철물을 생각하면 오산이다. 2층 규모의 철근 콘크리트 독립 건물이다. 출입문(금고문)은 당시 최고의 보안 수준을 자랑하던 미제 수입품을 달았다. 일제강점기 당시 군산의 부농 시마타니 야소야가 1920년대에 지은 건물로서 현금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 불법, 합법으로 수집한 고미술품이 가득했던 보물창고였다. 금고 주변으로는 수십 점의 석탑, 부도탑, 석등, 문인석/무인석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시마타니가 우리나라 여기저기에서 가져다 놓은 것들이다. 보물로 지정된 발산리 5층석탑과 석등도 본래 완주 봉림사터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시마타니만 아니었으면 지금은 봉림사지 5층석탑으로 불렸을 것이다.

교사 뒤편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기와 건물이 시마타니금고이다.
1920년대 당시 최고의 보안 수준을 자랑하던 금고 출입문
금고 내부는 보안 면에서 거의 수용소에 가깝다. 실제로 한국전쟁 때 인민군은 시마타니금고를 반동분자 수감 시설로 사용했다고 한다.
완주 봉림사터에서 옮겨온 5층석탑(보물 제276호)

전하는 일화에 따르면 시마타니의 셋째 아들이 특히 조선문화재에 관심이 많았는데 1945년 패전으로 나라를 뺐기고(?) 일본으로 귀국할 처지가 되자 아예 한국으로 귀화 신청을 했다고 한다. 이것저것 다 떠나 문화재에 대한 열정 하나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일본인 특유의 오타쿠(おたく)의 그림자도 겹쳐 보인다.
물론 귀화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그후 시마타니 2세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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