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청을 중심으로 광화문과 남대문 일대에는 은행에서 운영하는 금융박물관이 세 곳 있다. 역시 금융의 중심거리답다.
민간에서 운영하는 신한은행과 우리은행의 박물관은 별도의 기회가 있으면 소개하기로 하고 오늘은 ‘돈을 발행하는 은행’이자 ‘은행의 은행’ 격인 한국은행에서 운영하는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을 가보겠다.
돈의 역사, 돈의 종류(우리나라 돈, 세계의 돈), 돈의 흐름(즉, 금융), 돈의 공급 조절(통화정책), 그밖에 돈에 관련된 재미난 이야기를 전시하고 있다. 한 마디로 ‘돈의 모든 것’을 전시한 박물관이다.



박물관 측의 권장 동선은 정면 화폐광장 쪽이 아닌 왼편 통로 방향이지만 대부분의 관람객은 화폐광장을 따라 정면으로 들어서게 된다. 미안한 얘기지만 박물관의 동선 유도는 실패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시리즈에서는 박물관에서 제시한 모범 동선을 따라가 보겠다.
첫 번째 전시는 한국은행에 관한 것이다. 한국은행의 설립부터 연혁, 기능에 대해 전시하고 있다.

이어지는 전시는 화폐의 일생이다. 돈의 제조, 유통, 훼손, 폐기까지 돈의 생로병사를 모두 담고 있다. 이 코너에서는 위조지폐를 막기 위한 다양한 장치에 대해 비중 있게 소개하고 있다.
위폐를 사이에 둔 창과 방패의 진화를 도전(?)과 응전의 구도로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사진으로 위조지폐를 만들게 되자 지폐에 숨은그림이 그려지고, 위폐 인쇄기술이 발달하게 되자 지폐에 볼록인쇄 기법이 도입되고, 스캐너 등장 이후에는 부분노출은선이 부착되고, 디지털카메라와 복합기로 위폐가 정교해지자 새로운 지폐용지가 개발되고 홀로그램이 도입되었다고 한다. 숨은그림, 돌출은화, 숨은 은선, 홀로그램, 앞뒷면 맞춤, 잠상(기울이면 나타나는 문자), 색변환 잉크, 볼록 인쇄 등 위폐를 구별하는 각종 장치에 대한 설명과 함께 진짜 돈과 가짜 돈을 비교 전시해 놓았다.
바로 이어서 돈과 나라경제의 관계까지 살피면, 이제 정상적으로 화폐광장에 이른다. 박물관의 메인은 바로 이곳이다.

이 코너에는 꼼꼼히 살펴볼 만한 아주 유익한 전시 내용이 가득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전시 연출 면에서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지폐를 아크릴로 감싸고 이걸 유리 진열장 안에 넣었는데, 관람객은 반사되는 조명 빛을 피하려고 고개를 이러 저리 돌려가며 읽어야 한다. 네임택 또한 투명 아크릴 위에 글을 적어 놓은지라 보기에는 깔끔하지만 역시 읽기에는 좀 불편하다. 설명할 내용이 너무 많아 패널의 글자 크기가 작은 것도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비록 읽기는 불편했지만 콘텐츠의 내용만큼은 차고 넘친다. 동서고금 화폐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은 이 공간에 전시돼 있다. 화폐 이전에 돈의 기능을 하던 물품화폐(곡물, 농기구, 무기, 금속, 금은세공품)부터 최초의 화폐와 그 이후 화폐의 변천 과정이 꼼꼼히 전시돼 있다.
여기서 문제 하나. 다음 중 돈의 어원으로 맞는 것은?
1.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 돌고 돈다고 해서 ‘돈’이라 부르게 되었다.
2. 칼 모양으로 생긴 초기 화폐를 도화(刀貨)라고 불렀는데 그 발음이 ‘돈으로 와전됐다.
박물관에서는 어느 것이 옳다고 밝히지 않고 두 가지 설이 있다고만 적어놓았다.
이어지는 우리나라 화폐의 변천 코너.
국가 차원에서 발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화폐(철전)는 고려 초기 996년의 건원중보이다. 돈이라고는 하지만 막상 별로 돌지는 않았다. 엽전이라고 불렀던 이런 돈들은 극히 일부의 상류층에서만 사용됐었고 이런 추세는 조선시대 상평통보(1678)가 일반화될 때까지 계속된다.
상평통보의 시대는 200년 이상 지속되다가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의 한국은행권 혹은 조선은행권 발행에 때맞춰 회수되어 폐기된다. 어쨌든 우리나라의 엽전은 근 천년의 역사를 이어온 셈이다.
문제 둘! 엽전은 왜 엽전일까?


액체 상태의 금속을 음각 몰드(모양틀)에 부어서 동전을 만들게 되는데 금속이 굳은 후에 모양틀을 분리하면 나뭇가지에 수십 개의 이파리가 붙어있는 형상의 돈나무가 만들어진다. 돈나무의 이파리 같다고 해서 엽전(葉錢)이라 불렀다고 한다. 틀에서 떼어낸 후 본드로 조립하는 프라모델 장난감을 연상하면 틀림없다.
엽전 얘기 나온 김에 ‘땡전’의 유래도 알려드리겠다. 땡전은 아주 가치가 낮은 돈을 말한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 위해 발행한 당백전이 시중에 너무 많이 풀려서 당백전은 ‘돈 가치가 없는 돈’의 대명사가 된다. 당백전은 줄여서 당전이 되고 다시 땅전 ⇨ 땡전으로 음운변화를 거치면서 ‘땡전 한 푼 없다’는 표현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제 엽전의 시대는 저물고 지폐의 시대가 열린다. 명목상 대한제국기에 발행한 구.한국은행권과 일본이 불법으로 발행한 일본 제일은행권이 혼용되다가 1914년에야 비로소 조선은행 명의의 100원권이 발행된다.
김홍집 내각의 외무대신 김윤식을 모델로 했다(여러 설 중의 하나)는 조선은행권은 해방 이후에까지 이어진다. 일본어 문구를 삭제하고 일본 정부의 휘장인 오동나무 문양을 무궁화로 바꾼 채 그대로 시중에 통용된다. 세계적인 수준의 대한민국 ‘뽀샵’은 이렇듯 역사와 전통이 깊다.
1950년 한국은행이 설립되고 그해 7월, 피난지 대구에서 최초의 한국은행권이 발행된다. 이때 도안 인물은 이승만이다. 우리가 도안 인물의 대명사로 인식하고 있는 세종대왕께서 등장한 것은 1960년 4・19 직후의 일로서 액면가는 1,000환이었다. 이때부터 우리에게 익숙한 조선시대 위인들이 도안 인물로 등장한다. 이승만, 이도(세종대왕), 이순신, 이황, 이이 등 햇수로 60년간의 이씨 독점과 햇수로 100년에 가까운 남성 독점 시대에 종지부를 찍으며 5만원권의 신사임당이 등장한 것은 2009년의 일이다.
인물 이외의 상징물로는 첨성대, 독립문, 거북선, 경회루 등이 이어진다. 73년에는 고액권의 상징, 만원권이 처음 발행된다. 물론 이때도 세종대왕이지만 처음부터 대왕님은 아니었다. 당초 석굴암과 불국사가 새겨진 만원권의 도안이 통과되어 발행 공고까지 마쳤으나 종교 편향 시비에 휘말려 세상의 빛을 보지는 못했다. 석굴암과 불국사는 특정 종교의 기념물이라기보다는 한국의 대표문화유산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싶어서 뒷맛이 개운치 않다.
이밖에 북한의 화폐, 중국, 일본 등 주요국 화폐의 역사, 종류, 특징 등이 전시돼 있고 기념주화(혹은 지폐) 코너도 마련되어 있다. 전시관은 대단히 넓고 전시물의 연출은 대단히 촘촘하다. 이상 살펴본 코너가 전체 전시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1층과 2층 사이, 중2층에는 옛 금융통화위원회 회의실, 옛 한국은행총재실, 화폐박물관 건축실 등이 있다.
2층으로 올라가면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있는 모형금고에 들어가 볼 수 있고 세계의 다양한 화폐를 한 번에 비교해볼 수 있다. 특이하다고 소개된 지폐들을 살펴보자면 호주의 지폐는 폴리머라고 하는 플라스틱 재질이고 스위스의 지폐는 도안이 세로로 길게 되어 있다. 세로 화폐는 스위스 돈이 유일하다고 한다. 싱가포르의 돈은 영어, 중국어, 말레이어가 병기돼 있으며 중국 돈은 중국어와 함께 몽골어, 위구르어, 티베트어가, 벨기에 돈은 네덜란드와 프랑스어가 병기돼 있다.
액면이 특이한 돈도 있다. 1/2, 2와 1/2, 3, 8, 15, 75, 90, 250 등이다. 이중 특히 15, 45, 90차트(kyat)는 옛 버마은행연합에서 발행한 지폐이고 1994년 이후 미얀마중앙은행 명의로는 더 이상 이런 단위의 화폐는 발행하지 않는다고 한다.



같은 층의 기획전시실에서는 ‘한중일 고대화폐의 흐름’ 기획전이 이번 달부터 올 12월까지 전시될 예정이며, 한은 갤러리에서는 한국은행이 소장한 미술 명품전이 3차로 나누어 올 11월까지 개최될 예정이다.

화폐박물관은 1912년에 완공되어 지난 1987년까지 한국은행 본점으로 쓰였던 100년 역사의 건물이다. 화폐에 관한 모든 것을 살펴보는 전시 관람이 우선이지만, 건물 내외부를 돌며 유서 깊은 건물의 내력을 답사해보는 것도 놓칠 수 없는 관람 포인트가 되겠다. 간혹 오는 단체관람객을 제외하면 의외로 방문객이 그리 많지 않아 여유 있는 답사가 충분히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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