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의 창(네이버 연재)

한산모시관

kocopy 2025. 3. 11. 09:12

전북 군산에서 북쪽으로 강을 하나 건너면 충남 서천이다. 도 경계를 이룰만큼 커다란 이 강의 이름은 금강이다.

서천하면 떠오르는 것은 장항선, 마량리 동백, 신성리 갈대밭, 국립생태원 등이 있지만 역사적으로 보나 사람들의 인식으로 보나 서천하면 역시 ‘한산모시’가 제일로 꼽힌다.

한산모시?
이순신장군이 왜적을 무찌르던 한산도에서 만들어서 한산모시라고 알고 계신 분, 분명히 있을 거다. 한산이 지금은 충남 서천군의 한적한 면이지만 불과 100년 전(1913년)까지는 별도의 군일 정도로 큰 고장이었다. 고려시대 한때는 한주(韓州)라 불린 적도 있었으며, 한산 이씨의 본관이기도 하다. 한산은 1500년 전통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한산모시 짜기’로 유명한 고장이며, 한산모시관에 가면 이에 대한 모든 것을 만나볼 수 있다.
모시짜기는 일일이 사람 손을 거쳐야 하는 완전 수공예품으로서 모시풀을 이어 붙여 가느다란 실처럼 만드는 작업은 손과 이를 통해서만 진행할 수 있다. 이가 파여 골이 날 정도가 되면 모시짜기에 이골이 났다고 말한다.

모시짜다 이골이 난 분을 직접 만나려면 충남 서천군 한산면 ‘한산모시관’에 가야 한다. 매우 저렴한 입장료 1,000원(어린이는 300원)을 내고 단지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누각 형태의 전통 한옥 한 채가 눈에 띈다. 이곳에서는 안채라고 부르는 시연공방이다.

모시짜기는 대단히 고된 노동이다. 이골이 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습도를 유지하기 위해 지상보다 낮은 반지하 움막이나 토굴에서 작업을 해야 하므로 일하는 내내 습한 환경을 벗어날 수가 없다. 옷감으로 완성되기 전까지는 모시풀에 섬유질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환경이 건조할 경우 실이 말라 끊어지거나 바스러지게 된다. 그나마 요즘은 가습기를 사용하면서 반지하 신세만은 면했다.

모시짜기 기능보유자 무형문화재 방연옥 여사가 모시를 짜고 있다. 습도를 유지하려면 이처럼 비닐장막을 치고 가습기를 틀어놓은 채 작업해야 한다.

 

뿌옇게 올라오는 연기는 가습기에서 나온 것이다.

모시를 짜려면 먼저 잘 고른 모시줄기(태모시)를 이어붙여서 실(모시굿)을 만들어야 한다. 이 과정엔 기계는 물론이고 간단한 도구 하나도 쓰이지 않는다. 오직 손과 입으로만 작업한다.
사진이나 영상에서 보았던, 베틀에서 모시를 짜는 작업은 한산모시 제작의 최종 과정이다. 그에 앞서 ①모시풀 재배 ②모시풀 수확 ③태모시 만들기 ④모시 째기 ⑤모시 삼기 ⑥모시 날기 ⑦바디 끼우기 ⑧모시 매기의 과정을 거친다(내용 출처: 한산모시전시관).
비닐장막을 치고 모시 짜는 방을 나와 대청마루를 건너면 ④번 모시 째기와 ⑤번 모시 삼기를 시연하는 방이 나온다. 방안에서 시연하는 모습을 유리방 바깥에서만 관람할 수 있지만 운이 좋아 ‘한산’할 때 가게 되면 방안으로 쓰윽 들어가도 차마 나가라고 내치지는 않는다.

태모시를 째고 이어붙여 이와 같은 실(모시굿)을 만든다.
방안의 습도를 유지하면서 관람객으로부터 작업을 방해받지 않기 위해 한쪽 벽이 유리면으로 마감돼 있다.

 

방연옥 할머니께 다가가 이것저것 여쭤보면 바로 그 자리가 현장학습장이 된다.

 

이골이 났다는 말의 유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방 벽면에는 한산모시 제품과 작업 도구를 걸어 놓아 결과적으로 가장 자연스러운 전시가 구현됐다.

시연공방을 나오면 좌측 안쪽으로 한옥 외관에 기와를 얹은 콘크리트 2층 건물이 보인다. 한산모시전시관이라 이름 붙은 이곳에서는 한산모시의 내력과 제작 과정, 천연염색 및 관련 장신구, 모시의 특성과 재배 과정 등을 종합적으로 살필 수 있다. 실물 전시와 관련 설명으로 2개 층을 채우고 있는데 공간도 넓고 자료도 풍부하여 학습을 위한 시설로서는 더할 나위 없지만 흥미 있는 전시는 못 된다.
이밖에도 한산모시관 단지 내에는 토속관, 모시매기 공방, 농기구 전시장, 모시제품 홍보관 등 다양한 형태의 시설이 있다.

한산모시를 사고파는 한산오일장은 끝자리 1일과 6일에 한산읍내에서 열린다. 마침 날짜가 맞아 잔뜩 기대를 하고 장터로 나섰으나…… 어찌나 한산하던지!

신윤복의 풍속도를 모형으로 재현한 이 전시물은 그림 속 아낙들의 옷이 한산모시라는 전제(?)가 붙는다.
왼편 초가는 전통 방식으로 모시를 짜던 반지하 움막집, 오른편 초가는 모시매기 공방

모시풀의 줄기를 베어 모시옷을 만들고 나면 잎이 남는다. 남는다고 그냥 버리면 조선사람이 아니지! 모싯잎으로는 모시떡을 만든다. 깻잎과 거의 유사하게 생겨서 사촌쯤으로 보이지만 깻잎이 한해살이인 반면 모싯잎은 한번 심으면 거의 10년을 수확하는 다년생 풀이다. 둘은 이렇게 수명이 다르다.

멥쌀가루에 모싯잎가루를 섞어 반죽하면 옥색 때깔로 빛나는 모시떡 혹은 모시송편을 만들 수 있다.

한산에 들렀다가 모시만 보고 소곡주를 빠뜨리면 서운하다. 한산소곡주(素麯酒)는 나라가 패망한 후 이 지역의 백제 유민들이 나라 잃은 한을 달래며 소복 입고 빚었다는 유래를 전하고 있으니 서천에서는 ‘망국의 한’도 참으로 풍요롭게 달랬다. 망국의 한도 좋고 풍요도 좋으나 소곡주를 마실 때 주의할 것이 있다. 이 술의 별칭이 앉은뱅이술이다. 무슨 술이 이리 맛있지? 해가며 홀짝홀짝 마시다 보면 술에 취해 일어서지도 못한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산면에서 요즘 가장 인기 있는 대표 선수는 모시도 소곡주도 아닌 신성리갈대밭이다.
전 세계의 이목이 판문점으로 쏠렸던 지난 한 주 가장 주목받았던 영화《공동경비구역 JSA》에서 극중 이병헌은 갈대밭 사이에 몸을 감추고 민원(?)을 해결하다 그만 지뢰를 밟고 만다. 우연히 마주친 북한군 병사(송강호・신하균 扮)가 구해준 것을 계기로 이들은 위험한 우정을 쌓아간다. 영화에서는 판문점 근방 비무장지대로 묘사된 이 갈대밭이 실제로는 한산면 신성리 갈대밭이다. 아는 사람만 알던 이곳이, 영화가 개봉된 2000년 이후로는 전국구 명성을 얻게 된다. 그후미안하다 사랑한다(2004년)추노 (2009년)자이언트(2010년)가 다녀가면서 이제 가을이면 관광객이 넘쳐나는 유명 출사지가 되었다. 영화 한편이 관광지의 신분을 바꾸어놓은 셈이다.

갈대는 새 잎이 자라는 봄엔 청갈대, 무르익은 여름엔 은갈대, 나무에 낙엽지듯 늦가을부터는 금갈대로 옷을 갈아입는다. 은갈대에서 금갈대로 옷을 갈아입을 무렵의 신성리갈대밭
새 잎이 나기 전 이듬해 봄까지 살아남은 금갈대

갈대는 강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강 하구에서 잘 자라는데 하구둑으로 막혀버린 금강변에 이런 대규모 갈대밭이 있다는 것은 모르긴 해도 꽤 많은 공력과 돈의 흔적일 것이다. 사실 요즘은 그 무엇도 ‘스스로 그러한’ 것을 찾아보기 힘들다.
‘갈대의 순정’도 그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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