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의 창(네이버 연재)

군산근대역사박물관

kocopy 2025. 3. 9. 08:40

“지붕 없는 박물관”
‘소리 없는 아우성’만큼이나 모순된 표현이다. 박물관은 유형의 시설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지붕이 없으면 박물관이 아니다.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 제1장 2조 1항>
"박물관"이란 문화·예술·학문의 발전과 일반 공중의 문화향유 및 평생교육 증진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역사·고고(考古)·인류·민속·예술·동물·식물·광물·과학·기술·산업 등에 관한 자료를 수집·관리·보존·조사·연구·전시·교육하는 시설을 말한다.

 

“유럽은 도시 자체가 박물관이다.”
노천에 널린 문화재가 너무 많아 도시 자체가 박물관이라는 뜻인데, 이태리나 체코 등의 유럽을 여행한 사람들이 이런 표현을 자주 한다.
우리나라에서 지붕 없는 박물관을 표방하는 대표적인 도시는 경북 안동이다. 안동의 지정 문화재는 2018년 4월 현재 국보 5점을 포함하여 총 320점이다. 도시 어디를 가나 문화재를 접할 수 있으니 안동 전체가 박물관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안동에서 ‘지붕 없는 박물관’의 느낌은 받지 못했다. 문화재가 도시 전체에 산재해 있을 뿐이지, 안동은 엄연히 21세기의 도시이다. 안동이 표방하는 유교문화의 전통과 그와 관련된 문화재는 시기적으로 조선시대가 기준이다. 그런데 아파트와 현대적인 도로가 놓인 안동에서 사실 조선시대의 느낌이 와 닿지는 않는다.
정작 지붕 없는 박물관의 느낌을 주었던 도시는 바로 전북 군산이다.
군산에서도 ‘근대역사문화의 거리’라고 이름 붙인 월명동, 신흥동, 장미동 일대, 이른바 구도심이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전경

“군산 시간 여행 1930’s”
군산 시내에는 곳곳에 이런 문구가 걸려있다. 1930년대 일제가 자국으로 쌀을 실어 나르기 위한 수탈 항구(군산내항)로 조성한 군산시내의 신흥동 월명동 일대는 당시 일본인 지주들이 모여 살던 부촌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때의 식민지 흔적이 오늘날은 모두 근대문화유적이 되어 군산의 관광 효자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
군산 근대역사문화의 거리는 정말 1930년대 분위기일까?

군산시의 캐치프레이즈, Hello Modern

영화를 찍기 위한 세트장처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지금보다 한참 전의 도시라는 느낌은 든다. 곳곳에 일본식 가옥이 눈에 띄고 골목이 반듯하고 거리도 깔끔해서 일제강점기, 그 시절의 이국적인 느낌이 전달된다.
이중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히로쓰가옥이다. 일제의 적산가옥으로서 현재는 신흥동일본식가옥 혹은 김혁종가옥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재청 등록문화재로 관리 받는 곳이다. 이곳이 유명한 이유는 문화재적인 가치 말고도《장군의 아들》바람의 파이터타짜등 수없이 많은 영화가 촬영된 곳이라 시각적으로 정서적으로 우리에게 익숙하기 때문이다. 영화타짜에서 고니(조승우 粉)가 기술을 배우겠다고 편경장(백윤식 粉)을 찾아온 집이 바로 이곳이다.

2층에서 내려다보는 일본식 정원의 이국적인 운치가 인상적이지만 아쉽게도 문화재 보호 명목으로 지난 2015년부터 가옥 내부 관람을 제한하고 있다.
등록문화재 제183호 신흥동일본식가옥, 일명 히로쓰가옥

일본집이 대체로 작다는 걸 감안하면 이곳은 대저택인 셈이다. 군산에서 돈을 많이 번 일본인 히로쓰 게이사브로는 아마도 이 집에서 대대손손 살길 원했던 것 같다.
아래층 위층에 방이 하도 많아서 해설사에게 물어봤더니 자식들을 모두 데리고 살려고 이렇게 많은 방을 만들었다고 한다.
기다란 마루를 걸어보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이건 관리부실이 아니다. 자객(닌자)의 접근을 알려주는 일종의 알람이었다고 한다. 자국(일본)에선 별 볼 일 없다가 군산으로 건너와 포목점으로 큰돈을 벌며 조선드림을 이룬 히로쓰 같은 사람은 밤이 두렵기 마련이다. 해방 이전의 신문과 자료로 초벌벽지를 바른 흔적도 남아있어서 이채롭다.
2층에서 내려다보는 일본식 정원도 이국적인 운치를 전해준다.
아쉽게도, 문화재 보호 명목으로 지난 2015년부터 가옥 내부 관람을 제한하고 있다.

여기서 가까운 곳에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 군산지점장의 사택이 거의 원형대로 남아 있고, 거리 곳곳에 이국적인 일본풍 가옥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 사택

일제강점기 당시에 지은 적산가옥을 문화재로 보존하는 것을 넘어, 아예 일본식 건물을 지어 관광 상품으로 활용하는 곳도 있다.
숙박과 커피점, 우동집, 사케주점까지 겸한 고우당은 2012년 11월 개장 당시만 해도 곱지 않은 시선이 꽤 있었지만 이후 의외의 대히트를 치고 말았다. 이국적이고 깨끗한 시설에 저렴한 요금까지… 지금은 최소 한 달 전에는 예약해야 이용이 가능하다.

고우당 전경
고우당 내부

가옥만 일본식이 아니다. 현재 우리나라 유일의 일본식 사찰인 동국사도 근대역사문화의 거리에 남아있다. 전문가가 아니라도 동국사의 대웅전 건물을 보면 대번 ‘아 이건 왠지 일본풍?’ 하는 느낌이 전해진다. 화려한 단청에 버선코처럼 날렵하게 치켜 올라간 한옥의 처마와는 달리 동국사 대웅전은 장식이 없고 선이 단순한 일본식 기와지붕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외벽으로 숭숭숭 뚫린 수많은 창문하며… 사무라이의 투구를 닮은, 딱 봐도 일본식 건물이다. 한국 느낌이 전혀 없는 범종까지도 이국적이다. 1913년 일제강점기 초기에 금강사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고, 해방 이후에는 조계종에서 인수하여 동국사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
‘국내 유일의 일본식’ 외에는 특별한 게 없었던 이곳에 2015년부터 의미 있는 볼거리가 생겨났다. 소녀상과 참회비.
우리 눈에 익은 ‘앉은 소녀상’과 비교하자면, 황동색의 색깔하며 전체적인 분위기는 비슷하지만 의자에 앉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다는 점과 15세 전후로 보이는 ‘앉은 소녀상’에 비해 서너 살은 많아 보인다는 점이 다르다. 뒤쪽 벽면에는 일본어와 한국어로 새긴 일본 불교 조동종 종무총장 명의의 참사문(참회와 사죄의 글)이 적혀 있다. 조동종은 동국사의 전신 금강사를 개찰했던 종파로서, 과거 자신들이 제국주의 정부의 아시아 지배 야욕에 협조하면서 석가모니의 이름을 빌려 불교 교의에도 어긋나는 침략적인 해외포교를 자행했던 과오를 진심으로 사죄하며 두 번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다짐을 적어놓은 글이다. 꽤 긴 참사문은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우리들은 다시 한 번 맹세한다. 두 번 다시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그리고 과거 일본의 억압 때문에 고통을 받은 아시아 사람들에게 깊이 사죄하면서 권력에 편승하여 가해자 입장에서 포교했던 조동종 해외 전도의 과오를 진심으로 사죄하는 바이다.

대한불교조계종 동국사

군산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곳을 꼽으라면 히로쓰가옥도 고우당도 동국사도 아닌 바로 이성당이다. 이성을 잃은 빵집이라 감히 말할 수 있을만큼 전국에서 줄을 가장 길게 서는 유명 제과점이지만 이 집의 내력도 군산의 일제강점기와 깊이 관계하고 있다.
군산 인구의 절반이 일본인이던 1920년대, 그들이 좋아하던 단팥빵을 만들어 팔던 이즈모야제과가 생겨났고 패전과 함께 일본인 주인은 부랴부랴 가게를 처분하고 본국으로 도망갔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새 주인은 그 이전의 내력을 지우고 싶었는지 간판에는 ‘SINCE 1945’라고 적혀 있다. 타이틀 달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군산 이성당을 안동의 맘모스제과, 대전의 성심당과 함께 전국 3대 빵집이라고들 한다.

이성당에서 빵을 사려는 사람들의 줄이 유명 가수의 콘서트장을 방불케 한다. 저 뒤편으로 줄이 10m 넘게 이어져 있다.

군산항(지금의 군산내항) 쪽으로 내려가면 당시 총독부 차원에서 벌인 수탈의 흔적을 주요 건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일대의 이름이 장미동이다.
쌓을 장에 쌀 미. 호남평야 각지로부터 군산항에 모인 쌀가마가 겹겹이 쌓여 있던 동네라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하늘 높이 치솟은 장미(藏米)는 다름 아닌 일본으로 실어 나를 미곡이었다. 장미에는 가시가 있다고 했던가? 예쁜 이름과는 달리 아픈 상처와도 같은 배경을 지닌 곳이다.
바닷가를 바라보고 왼쪽부터 차례로 군산세관, 일본18은행, 조선은행 등이 있고, 현재 내부는 각각 호남관세전시관, 군산근대미술관, 군산근대건축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호남관세전시관으로 사용되는 구.군산세관
구.군산세관 내부 전시실
군산근대건축관으로 사용되는 구.조선은행 군산지점

이들 건물 사이에 군산근대사의 흔적을 유물과 모형, 그리고 체험 코너로 구성한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지붕 있는 박물관이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1, 2, 3층 차례로 해양물류역사관, 독립영웅관, 근대생활관이 자리 잡고 있으며 3개층을 관통하여 어청도 등대 모형이 놓여있다. 전시 내용은 제목 그대로이다. 1층 해양물류역사관에서는 국제무역항 군산, 삶과 문화, 해상유통의 중심, 해상유통의 전성기, 근현대의 무역, 바다와 문화라는 소제목 전시 코너별로, 물류항으로 번성한 군산의 어제와 오늘을 조망한다. 2층 독립영웅관에서는 민족의 영웅들, 8인의 의병장, 호남 최초의 삼일만세운동, 국내 독립유공자들, 옥구농민 항일항쟁, 해외 독립유공자들 코너를 통해 호남 최초의 삼일만세운동 지역이며 전북에서 두 번째로 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항일의 고장 군산의 면모를 보여준다. 3층 근대생활관은 도시의 역사, 수탈의 현장, 서민들의 삶, 저항과 삶, 근대건축물 코너별로 일제의 강압적 수탈 속에서도 꿋꿋한 삶을 이어온 1930년 전후 군산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밖에 기획전시실, 기증자전시실, 어린이체험관을 두고 있다. 이 박물관은 특히나 각 분기별 1회 이상의 꾸준한 기획전시가 인상적이다. 국립박물관이나 서울, 부산 등 거대도시의 시립박물관에서도도 연 4~5차례 이상의 기획전시를 개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박물관이 지닌 역량과 관계자의 성의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로비

군산 근대역사문화의 거리. 대략 20년 전만 해도 당장 없애버려야 할 수치스런 잔재였지만, 이제는 이를 통해 역사의 교훈을 배울 만큼 시간이 많이 흘렀고 또 우리의 의식도 그만큼 성장했다.
너무 춥지도 너무 덥지도 않은 이 짧은 봄날에 지붕 없는 박물관, 군산 근대역사문화의 거리로 시간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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