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부여군의 첫인상은 ‘작고 소박’하다.
천오백년 전 백제의 도읍 부여에 처음 오는 사람이라면 막연하게나마 신라의 경주 정도 되는 어떤 도시를 그렸을 것이고, 곧이어 실망했을 것이다. 이렇듯 부여는 인구 7만 명의 작은 지방도시이지만 한때는 사비라 불리던 백제의 3번째 수도이다.
이것은 대단한 타이틀이다. 우리나라에서 한 국가의 도읍이었던 도시는 부여 외에 서울, 공주, 경주밖에는 없다. 전주와 철원도 각각 후백제와 태봉의 도읍이었지만 나라가 존속했던 기간이 너무 짧아 타이틀을 달아주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지금의 북한 지역까지 넓혀도 평양과 개성 정도만 추가된다.
그러므로 부여에 왔다면 비록 겉핥기라도 백제는 둘러보고 가야 한다.
부여에서 백제 유물을 가장 많이 만날 수 있는 곳은 국립부여박물관이지만, 백제에 대해 가장 많은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는 곳은 백제역사문화관이다.
백제에 관해 전시한 박물관이지만, 나라의 역사를 소재로 한 다른 박물관과 비교하면 확실하게 차별화된 특이점이 있다. 그 단서가 되는 안내문구가 박물관에 붙어 있다.
‘우리 문화관 내 전시물은 복제품입니다.’
이 박물관에는 진품 유물이 없다는 뜻이다. 이런 형태의 박물관을 만들게 된 것은 바로 ‘백제의 빈약한 유물’ 때문이다. 백제 유물의 가치가 낮다는 말이 아니라 남아있는 백제 유물이 별로 없다는 뜻이다.
백제는 역사 기록과 관련 유적이 삼국 중에 가장 적게 남아 있는 나라여서 유물 위주의 박물관은 만들고 싶어도 못 만든다. 유물이 많은 신라와는 형편이 많이 다르다.
그러므로 백제역사문화관은 수천 년 전의 유물을 감상하거나 왕조 중심의 백제사를 펼쳐놓은 공간이 아니다. 백제 사람들의 생활 모습과 옛 백제 땅에 여전히 남아 있는 백제의 흔적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전시관이다. 따라서 백제역사문화관의 실체는 백제의 ‘역사와 왕조’가 아니라 백제의 ‘생활과 민속’이다.
박물관은 1층과 2층에 걸쳐 크게 네 개의 전시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그 중 첫 번째, 제1전시실은 ‘백제의 역사’이다.
기원전 18년 하남 위례성에서 온조왕을 시조로 하여 건국한 백제가 공주로 도읍을 옮긴 웅진 시대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사비 시대를 거치며 700년간 이어져 온 역사를 개괄하고 있다.
660년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게 함락되고 의자왕은 포로가 되어 당나라로 압송되면서 백제의 사직은 막을 내린다. 그러나 백제는 그 후 3년의 역사를 더 이어간다.
전시실에서도 이 3년의 시간에 상대적으로 많은 공간을 할애하고 있다. 이 3년의 시간을 우리는 백제부흥운동이라고 부른다.
백제는 18만 나당연합군에게 수도가 함락되고 왕이 포로가 된 뒤에도 지방의 전력만은 거의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들이 3년에 걸쳐 강력한 저항전을 벌인다.
저항의 양상 또한 오합지졸의 게릴라전이 아니라 나라 대 나라의 정규전 수준으로 펼쳐진다. 왜에서 바다를 건너 온 5만 명의 지원군도 백강에 당도한다. 이 당시 백제가 왜에서 차지했던 위상으로 볼 때 이는 본국을 구원하러 온 원병인 셈이다. 왜에 가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게 되고 부흥운동은 나라를 거의 되찾을 뻔한 수준까지 이른다. 하지만 백제부흥운동은 결국 실패했는데 원인은 백제부흥군을 이끌던 두 장군 복신과 도침의 내분 때문이었노라고 역사가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복신은 의자왕의 사촌동생, 즉 왕족이었고 도침은 승려였다.
이어지는 2전시실은 백제의 생활문화실로서 백제역사문화관의 하이라이트 공간이다.
백제에 살고 있는, 그리고 백제로 살아가는 모습을 담았다. 그래서 2전시실에는 유물은 물론이고 유물 모형도 없다. 오직 백제인들의 생활 모습을 담은 모형과 그림, 그리고 디오라마만 있다.
제2전시실에서 백제 사람들은 무얼 먹고, 어디서 자고, 건물을 어떻게 짓고, 어떤 여가를 즐겼는지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문제는 과연 백제인들의 생활모습을 이렇게 세세하게 연출할 만한 증거가 있느냐이다.
박물관은 관련 사료와 유물을 보고 연출하므로 고증 근거는 분명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박물관에 근거 없는 거짓말은 없다. 다만 조금 무리다 싶은 추정과 과장은 있을 수 있다.
백제의 생활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주요 사료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서기, 그리고 중국의 개별 왕조사 등이다.
중국 양나라 시대 유물 중에 양직공도라는 그림이 있다. 6세기 초에 양나라에 다녀간 주변 13개국 사신들의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는데, 이 중에 백제국사(百濟國使)가 있다. 모자와 신발을 포함하여 관복을 차려 입은 전신 샷이 그려져 있고 이를 통해 백제 의복을 고증하게 된다.
그리고 금동대향로라는, 백제를 대표하는 조형 작품이 전해지는데 여기에 다섯 명의 악사가 악기를 연주하는 조각이 부조되어 있다. 이를 통해 백제 음악세계의 한 단면을 알게 된다.
이런 자료들을 근거로 백제인의 생활 모습을 연출하게 된다.
사실 백제에 관한 자료는 너무 빈약해서 추정과 과장이 없을 수 없다. 그래서 본 전시관에서 연출한 모습이 과장됐다고 비판하는 역사학자들도 있다.
다음 3전시실은 백제의 정신. 이곳의 핵심 코너는 무령왕릉이다. 삼국의 왕릉 중에 피장자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밝혀진 경우는 무령왕릉 단 하나이다. 여기서 수습한 유물을 토대로 백제 역사와 생활문화의 많은 부분이 밝혀졌다. 안 그래도 유물이 부족한 백제사의 경우에 무령왕릉이 차지하는 비중은 백제 사료의 거의 절반이라고 평하는 학자들도 있다.
무령왕릉의 발견은 우리나라 고고학 발굴사의 최대 사건이라고 평가받고 있고,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 또한 흥미진진하다.
학계에서는 무령왕릉의 발견을 백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세기의 발굴이라고 평가한다. 어떤 천운이 닿았기에 일제강점기의 악랄한 문화재 도굴로부터 몸을 숨겨 1971년에야 비로소 발견될 수 있었을까?
유홍준은「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통해 무령왕릉 발굴을 역사상 최고의 발굴이자 동시에 최악의 발굴이라고 평하며 아래와 같이 한탄했다.
<1500년을 두고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을 조금만 더 참고계시다 나올 것이지 어쩌자고 하필이면 척박한 그 시절을 택해 세상에 나왔을까?>
1971년 7월 7일부터 이틀간 3000점 가까운 유물을 이틀 만에 발굴 완료했으니 유물 수습이 아니라 보자기에 쓸어 담았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래서 무령왕릉의 내부 재현을 두고 맞다 틀리다 주장하는 사학계의 공방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다음 4전시실은 백제의 전통실. 대외 교류에 적극적이었던 백제의 문화 전통을 소개하고, 그 문화가 일본으로 전파되어 일본이 고대국가 체제를 확립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던 바를 보여주고 있다.
백제의 흔적은 오늘날 일본의 큐슈와 시코쿠 지방 곳곳에서 흔하게 확인할 수 있다. 백제식으로 쌓은 성은 물론이고 지명과 언어와 축제로도 남아 있다. 이 중의 대표적인 백제축제가 왓쇼축제이다. 이 축제에 대해 전시관에서는 영상 자료와 설명 패널로 소개하고 있다. 왓쇼축제는 오사카에서 매년 열리는 거리행진 축제인데 백제 복식을 차려입은 많은 사람들이 사신 행렬을 따라 가며 ‘왓쇼이 왓쇼이’를 외친다. 백제의 사신이 바다를 건너서 ‘왔소’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수많은 선진 문화를 전해주던 백제의 사신을 열렬히 환영하면서 외쳤던 구호(왔소)가 그대로 축제의 명칭이 된 경우이다.
‘made in 백제’는 곧 최고를 의미했다. 일본어 구다라나이(くだらない)가 ‘진품이 아니다’, ‘쓸모없다’라는 뜻이 된 연유는 당시 일본에서 백제 물건이 아닌 것은 명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구다라’는 ‘百濟’의 일본식 발음이므로 구다라나이는 ‘백제가 아니다’라는 뜻이 된다.
백제의 무엇이 그토록 일본열도를 열광케 했나?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作新宮室(궁궐을 새로 지었는데)
儉而不陋(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華而不侈(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게’
어떻게 나이 들어야 할까를 자주 생각하게 되는 요즘, 백제가 내게 주는 꿀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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