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의 창(네이버 연재)

짜장면박물관

kocopy 2025. 3. 14. 09:22

수많은 박물관의 전시 소재 중에서 대중적으로 이보다 더 인기 높은 것이 있을까? 이것은 인천에서 시작됐지만 이제는 전국 어디랄 것도 없이 한국인 누구나가 보편적으로 좋아하는 올타임 베스트셀러다.

‘이것’은 바로 짜장면이고 이것을 소재로 한 박물관은 인천 개항장 차이나타운의 짜장면박물관이다.


짜장면의 역사가 인천에서 시작됐다는 것은 확고한 정설이 아니라 단지 가장 유력한 썰(說)이다. 1890년대 제물포항에서 부두하역을 하거나 인력거를 끌던 산둥지방(山東省) 출신의 화교들이 면장(산둥식 된장)에 수타면을 비벼먹던 간편식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몸이 재산이고 시간이 돈이었던 쿨리(苦力; 부두하역 노동자)들은 간편하고 빠르게 먹을 수 있고 가격도 저렴하면서 자기들 입맛에도 맞는 점심 메뉴를 개발해야 했다. 딱 사발면이 필요했던 거다. 부두 노동 중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면장(춘장)에 면을 비벼먹던 초간편식이 바로 짜장면이었다.

쿨리(苦力)라 불렸던 부두하역 노동자들이 짜장면을 먹고 있다. 120년 전 사발면이다.

이 이야기를 인정한다면 지금 먹는 짜장면의 발상지는 인천이 맞는데, 문제는 음식점의 메뉴로서 처음 내건 곳은 과연 어디냐 하는 것이다. 그곳이 바로 짜장면의 원조일 것이다.
알려진 바로는 쿨리들이 직접 만들어먹거나 손수레 노점상들이 간이로 팔던 짜장면을 음식점 메뉴로 처음 만들어 내기 시작한 곳은 공화춘이라고 한다. 1905년에 산동회관으로 개업했다가 중국의 신해혁명 이듬해(1912년)에 중화민국의 시작을 기념한다는 뜻을 담아 공화춘(共和春; 공화국의 봄)으로 간판을 바꿔단다. 차이나타운을 대표하는 중국요리집으로서 80년 가까운 명성을 이어오다 차이나타운 위축에 따른 영업부진으로 1983년에는 가게 문을 닫게 되고 이후 폐가처럼 방치된다. 이 시절만 해도 역사와 전통, 원조, 1호, 이런 것들이 가치를 인정받던 시절이 아니었던지라 공화춘은 깨진 창틀 너머로 비둘기가 드나드는 흉가가 되고 말았다. 당시 인천 차이나타운이 지금 정도만 활성화됐더라면 공화춘 건물은 그때 이미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높은 빌딩이 섰을 것이 분명하다. 사람도 그렇지만 이렇게 오래된 건물의 내력을 살피다 보면 별별 주옥같은 말씀이 다 떠오른다.
새옹지마, 상전벽해, 뒤웅박팔자,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킨다 등등

2007년 무렵 흉가(?) 시절의 공화춘 건물

문을 걸어 잠근 채 방치되던 공화춘을 짜장면박물관으로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인천 중구청에서 수립하게 된다. 그후 짜장면박물관 건립 기본계획 보고서가 완성된 것은 2008년 9월. 기본계획이 수립됐으니 설계와 공사가 이어져야 했지만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건물 안전진단 결과, E등급을 받았다. E등급은 붕괴 위험을 나타내는 안전 최하 등급이다.
대대적인 보강공사를 하느라 꽤 긴 시간을 소비한 후, 내부 전시시설을 연출하여 공화춘은 2012년 짜장면박물관으로 탄생했다.

자장면박물관 조성과 관련된 당시 행정 서류. 이 당시엔 ‘자장면’이어야 했다.
사진기와 메모지를 들고서 삐걱거리는 계단을 무던히도 오르락내리락 거렸었는데, 그때 나는 사경을 오르락내리락한 셈이었다. 공화춘이 붕괴 위험으로 판명난 것은 기본계획 보고서가 완성된 후의 일이었다.
공화춘은 1900년대 초기에 중국식 중정형 건물로 지어졌고 지금은 등록문화재 246호이다.

박물관은 공화춘이란 간판이 걸린 곳으로 입장해야 한다. 짜장면박물관 입간판과 철가방 조형물이 서 있는 곳은 박물관의 후문으로서 관람객이 출입할 수 없는 곳이다.
1층에는 관람객 맞이 시설과 기획전시실, 주방 전시가 있고, 전시 공간은 2층에 있다.
중정에서 올라오는 계단을 가운데에 두고 시계 방향으로 돌아 나오는 관람 동선이다. 전시공간은 차례대로 1.화교 역사와 짜장면 2.짜장면의 탄생 3.1930년대 공화춘 접객실 4.짜장면의 전성기 5.현대의 문화아이콘 짜장면 6.1960년대 공화춘 주방 순이다. 6전시실은 1층에 있다.

박물관 로비에 해당하는 진입 공간 너머로 2층으로 오르는 중앙계단이 보인다. 중국건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정으로 뚫린 계단이다.
공화춘의 내부 의장시설을 활용한 천장 마감

짜장면은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쿨리라 불리던 화교 노동자들이 먹던 간편식에서 출발했다. 그때만 해도 지금 우리가 먹는 것과는 많이 다른 ‘진짜’ 중국 짜장면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어느 때부터 원조와는 다른 ‘딴 물건’으로 서서히 변화하면서 차츰 한국화한 것이다.
나는 이른바 원조 중국 짜장면을 먹어보지 못했다. 북경에서 짜장면을 시켰을 때 한국에서 본 것과 같은 것이 나오길래 ‘중국도 한국하고 똑같구나’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건 중국에서 파는 한국식 짜장면이었다. 중국 짜장면을 먹어 본 사람한테 나중에 들어보니 돼지고기로만 장을 볶고 색깔이 갈색에 가까우며 짠맛도 더 강하다고 한다. 면의 생김새도 칼국수 면에 가깝고, 일단 중국 현지에서는 짜장면을 파는 음식점이 아주 드물다고 한다. 아무튼 지금 우리가 먹는 짜장면은 한국으로 귀화한 음식이라고 말해도 크게 틀린 얘기는 아니다.
귀화는 비교적 일찍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 공화춘’이라는 전시 코너에 일가족 3대로 보이는 세 사람이 식탁에 둘러앉아 짜장면과 짬뽕을 먹는 장면이 연출돼 있는데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짜장면이 요즘 거랑 아주 비슷하다. 박물관의 모형은 어떤 식으로든지 고증을 거쳐서 연출하기 때문에 1930년대에는 지금의 형태로 이미 정착되었을 것이란 추정이 가능하다. 단무지, 양파, 춘장이 반찬으로 나온 것은 지금과 같지만 굵게 썬 대파 한 접시가 있는 것은 좀 특이했다. 어렸을 때 중국집에서 흔히 보던, 일명 엽차잔도 어찌나 반갑던지…

공화춘으로 외식을 나온 1930년대, 3대 일가족

다음 코너는 짜장면의 전성기.
짜장면의 전성기는 언제였을까? 아직 전성기가 안 지났다고 봐도 큰 무리는 아니다. 최근에 생겨난 배달앱의 가장 큰 수혜자 중 하나가 아마도 짜장면일 것이다.
하지만 박물관에서는 1970년대를 짜장면의 전성기로 보았다. 가족 외식 메뉴가 다양하지 않았던 탓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혼분식 장려운동의 영향으로 밀가루 소비가 크게 늘어난 것을 가장 큰 요인으로 꼽았다.

졸업식을 마친 중학생 일가족 4명이 최고(?)의 외식을 즐기고 있다. 음식점 내부에는 브라운관 방식의 작은 TV가 놓여 있고 벽에는 표어도 붙어있다. “분식으로 생활개선 향상하는 우리 체위”

다음은 짜장면 문화 코너이다.
이 코너의 설명을 읽고 있자니 짜장면을 만든 것은 사자와 곰이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사자표 춘장’과 ‘곰표 밀가루’.

짜장면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일종의 문화 아이콘이었다.
이 전시 코너에서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전시물은 철가방이다. 오늘날 우리 눈에 익은 함석판이나 알루미늄 철가방의 조상격인 나무 철가방이 전시돼 있다. 작은 뒤주 모양으로 생겼는데 이게 무척 무거워서 배달원들이 고생 좀 했다고 한다.

철가방의 원조, 목가방. 안에서 짬뽕 국물이라도 쏟으면???

짜장면과 자장면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한자(炸醬麵)에 기반을 둔 단어라고 ‘자장면’을 표준어로 고집해왔었지만 지난 2011년부터 짜장면도 복수표준어로 인정됐다. 이 박물관의 표기도 물론 짜장면박물관이다.
재밌는 설명이 눈에 띈다. 짜장면이나 때로는 중국인을 비하하는 말로 흔히 쓰는 짱깨가 사실은 돈통을 가리키는 중국어 ‘장궤(掌櫃 장꾸에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자를 그대로 풀면 ‘궤짝을 관장한다’가 되어 ‘가게 주인’ 혹은 ‘돈 많은 사람’을 뜻하게 된다.

이밖에 중국집 특유의 간장병, 식초병, 그리고 중국집을 상징하는 고량주도 전시돼 있다. 한켠에는 짐칸에 철가방을 올려놓은, 일명 쌀집 자전거가 세워져 있다.
1964년 당시 음식점 벽에 붙어있던 가격표도 눈에 띈다. 54년 전 가격은 짜장면 우동 150원, 간짜장 짬뽕 220원, 볶음밥 250원, 삼선 자 붙은 면들은 350원이었다. 탕수육은 900원, 그밖의 요리류는 시가(時價).
2층 마지막 코너에서는 인스턴트 짜장을 소개하고 있다. 물 부어서 끓여먹는 짜장 분말, 그대로 덥혀먹는 3분 짜장, 그리고 라면 형태의 짜장면들이다. ‘일요일은 내가 요리사’라던 바로 그 제품도 있다.

짜장면의 종류도 많다. 보통 짜장부터 간짜장, 유니짜장, 삼선, 쟁반, 사천, 고추, 유슬짜장까지 전시된 것만 8가지
1964년경 권장 가격표와 1970년대 공화춘 가격표

다시 1층으로 내려오면 마지막 전시 코너, ‘1960년대 공화춘 주방’이 있다. 한쪽에서는 수타면을 만들고 다른 한쪽에서는 화덕 위에서 웍을 다루는 모습이 모형으로 재현돼 있다. 화덕 위에서 웍을 다루는 요령, 짜장 볶는 법, 짬뽕 조리법 등도 적혀 있다. 중국음식의 맛을 가르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불맛을 내는 웍이라고 할 수 있다.
뒤편의 조그마한 기획전시실이 있지만 기획전시는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더 많다.

짜장면박물관이 위치한 인천 중구 선린동 일대는 우리나라 최대의 차이나타운이다. 한번 가셔서 짜장면도 한 그릇씩 먹고 간식으로 공갈빵도 먹고 짜장면박물관도 둘러보면 좋을 것 같다.
짜장면박물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영업중인 공화춘은 이곳과는 관련이 없는 그냥 등록상표라고 한다.

차이나타운의 삼국지벽화거리

박물관에는 없는, 짜장면 족보 얘기를 좀 더 하고 싶다.
짜장면은 중국음식일까? 한국음식일까? 한국에서만 대중화되고 정작 중국에서는 먹기 힘든 걸 보면 사실상 한국음식이라는 얘기가 타당하게 들린다. 하지만 짜장면을 처음 만들어 먹던 사람은 화교들이니 그래도 중국음식이라는 얘기도 틀린 말은 아니다. 고구려도, 아리랑도, 심지어 김치도, 옷깃만 스쳐도 뭐든 자기네 거라고 우기는 중국이 짜장면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것이 좀 의아하기도 해서 덧붙이는 말이다.


짜장면을 먹으며

정호승 詩

짜장면을 먹으며 살아봐야겠다.
짜장면보다 더 검은 밤이 올지라도
짜장면을 배달하고 가버린 소년처럼
밤비 오는 골목길을 돌아서 가야겠다.
짜장면을 먹으며 나누어 갖던
우리들의 사랑은 밤비에 젖고
젖은 담벼락에 바람처럼 기대어
사람들의 빈 가슴도 밤이 젖는다.
내 한 개 소독저로 부러질지라도
비 젖어 꺼진 등불 흔들리는 세상
슬픔을 섞어서 침묵보다 맛있는
짜장면을 먹으며 살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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