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시훈의 테마기행/2016~20년 25

바람의 나라 14일의 비망록 13.열 하룻날1 – 닿지 않는 바다

아침밥을 먹고 어제 본 양양 앞바다 수평선 쪽으로 걸어가 봤다.1시간을 걸었지만 마치 제자리걸음을 한 것처럼 수평선은 가까워지지 않는다. 아마 3시간을 걸어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바다를 포기하고 돌아오는 귀로에 말떼를 만났다. ‘저 앞에 보이는 숙소까지 갑시다!’말들이 택시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문득 해봤다. 설령 태워준다 해도 고삐도 없는 말을 내가 무슨 재주로 타겠나?택시를 놓치고(?) 숙소로 돌아와 보니 테라스 같은 곳에 사람들이 모여 차를 한 잔씩 놓고 시 한 수씩을 읊고 있었다. ‘우와! 이 모임, 수준 감당 안돼!’박남준 시인의 시집을 돌려 읽으며 낭독하는 시간. 나도 한 편 읽었다.진 씨 성을 가진 퇴직 교사 한 분의 순서가 되었다.고비에는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바다가 있다그리움에 피멍든 가슴..

바람의 나라 14일의 비망록 12.열흘날 – 게르. 몽골의 상징, 몽골인의 보호자, 나그네의 이정표

들에 널린 허브 향내를 맡으며 술에서 깨본 적이 있는가?색다른 경험이었지만 허브향을 맡는다고 술이 빨리 깨는 것은 아니다. 다만 허브가 신경안정에 도움을 준다는 말이 괜한 소리는 아닌 듯했다. 덜컹거리는 프루공 안에서도 잠 들 수 있었던 건 아침 내내 맡은 허브향 덕분이리라. 점심때쯤이 되자 술은 다 깼다.오늘 목적지는 욜인암이라고 했다. 며칠 전 말을 탔던 독수리계곡으로 다시 가는 것이다. 그때와 다른 것은 이젠 울란바타르로 올라가는 여정이다.욜인암의 숙소에 도착하니 다들 한 마디씩 한다.최고다.뜨거운 물도 잘 나온다.얼마 전까지도 브이아이피들만 오던 곳이라더라.숙소의 이름은 칸복드(Хаан Богд) 캠프. 몽골의 마지막 황제 이름을 붙인 장소답게 한 수준 높은 시설을 자랑했다. 사람들의 찬사가 이어..

바람의 나라 14일의 비망록 11.아흐렛날2 – 천상화원에서 죽다

모래에 이름을 새기면 다시 오게 된다기에 소망을 담아 적었다. 고비가 한국어를 모를 수도 있으니 몽골어로 한 번 더 적었다.사막을 벗어나면 초원이 나오기 전까지 황무지다. 사막, 황무지, 초지가 마치 그라데이션처럼 이어진다.이런 곳에도 풀이 자랄까 싶은 곳에 회양목을 닮은 관목이 무리지어 피어 있다. 저것은 몽골의 선인장인가? 저렇게 여리게 생긴 식물이 어떻게 이 척박한 곳에서……짠한 마음으로 그 옆을 지나다 가지 하나가 살짝 닿았을 뿐인데 종아리에 대번 생채기가 났다. ‘만만히 볼 종자가 아니구나!’고비에는 ‘고빈 함홀’인가 하는 식물의 군락이 흔하다던데 여린 외모(?)와는 달리 속은 거칠고 딱딱하다더니 바로 요 녀석인 것 같았다.유난히 깊고 강한 뿌리로 모래를 움켜쥐고 있는 탓에 주변의 흙과 모래가 ..

바람의 나라 14일의 비망록 10.아흐렛날1 – 나 홀로 고비를 맞다

어제 이 시간 홍그린엘스로 향했던 용사들 중 몇몇은 오늘 새벽에 또 가겠다고 결의했다. 새벽 5시, 어김없이 울리는 성덕대왕신종 소리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문밖으로 나와 보니…… 아무도 없다.어제 노느라 얼마나 피곤했겠나? 모래에 이름을 새기겠다는 간절함이 있는 나 같은 사람만 또 가는 거다.그렇더라도 동도 트지 않은 새벽에 혼자 가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해봤다. 해 뜨기 전엔 늑대가 돌아다닌다던데…솔직히 한 마리면 어떻게 해볼 자신이 있었다. 약간 구부린 기마자세를 취하다가 달려오는 녀석의 대갈통이 사정거리에 들어오면 오른발 후리기로 냅다 턱주가리를…… 캐갱캐갱캐갱~~~다리 사이로 꼬랑지를 말아 감춘 채 뒤도 안 돌아보고 10키로쯤 줄행랑을 칠 것이다.문제는 떼로 몰려왔을 때이다. ‘한 놈만 패야 할까? ..

바람의 나라 14일의 비망록 ⑨여드렛날2 – 모래언덕에서 해돋이, 낙타 등에서 해넘이2

해질 무렵 낙타 스무 남은 마리가 숙소 앞에 미리 와서 승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낙타의 깊고 그렁그렁한 눈 속엔 바다가 있다고 한다. 바다 좀 보려고 낙타 얼굴 쪽으로 다가가려는데, 너무 가까이 가면 낙타가 느닷없이 침을 뱉는다는 말에 소심하게 움찔! 서너 발자국 떨어진 채 줌인으로 당겨서 찍었다.낙타를 몽골에서는 티메(Тэмээ)라고 부른다.‘time’이라는 담배가 시장에 나왔을 때 뭐든 삐딱하게 불러버릇하는 사람들은 이걸 ‘티메’라고 불렀다. 그런데 티메가 낙타면, 몽골서는 ‘time’이나 ‘camel’이나 같은 담배가 된다.요즘 못된 풍토는 이런 대단한(?) 착안을 해도 죄다 아재개그로 몰아버리니 티메 얘기는 요기까지 ^^낙타를 말하자면 꼭 들려줄 이야기가 하나 있다.낙타의 눈물(the story ..

바람의 나라 14일의 비망록 ⑧여드렛날1 – 모래언덕에서 해돋이, 낙타 등에서 해넘이1

새벽 5시. 어제보다 두 시간이나 먼저 성덕대왕신종의 데에~~~~~~~~~~엥 하는 맥놀이가 고요한 게르 속 평원의 적막을 찢는다. 알람은 언제 들어도 괴롭다! 그것이 몽골의 대평원 품속일지라도.어젯밤 39.5°의 보드카와 4.5°의 피워(몽골에선 맥주를 이렇게 부르는데 비어랑 거의 비슷하게 들린다.)를 섞어 마시며 내일 아침 홍그린엘스의 일출을 보러 가자고 다짐했던 사람들 거의 전부가 모였다. 초원에서 맹세한 도합 44°의 결의는 이렇게 비장했다.길은 너무나 단순하다. 달빛 아래 희미하게 보이는 저 모래산을 향해 그냥 걸어가면 된다. 사실 길도 따로 없다. 내가 가는 곳이 길이다!(ㅍㅎㅎ 이 말 너무 멋져 ^^)1시간쯤 걷다 보면 옅게 새어나오는 여명이 발아래를 밝히기 시작한다.이때쯤이면 손전등을 꺼도..

바람의 나라 14일의 비망록 ⑦이렛날 – 삶과 죽음의 길이 예 있음에 저어

*경고: 오늘 게재분은 임산부 및 노약자, 비위가 약한 분은 보지 말기 바람. 몽골의, 도시 아닌 곳에서 살 자신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문제없다고 답했다.다만 조건이 있었다. 몽골 음식에 적응할 때까지 한국 음식을 섞어 먹는 기간이 적어도 1년 이상 필요하다.나는 음식 비위가 상위 5% 안에 드는 사람이다. 그런 내게 가장 입맛에 안 맞는 나라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미안하지만 몽골이다.몽골 음식은 고기와 유제품으로만 만들고 채소는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풀은 가축들이 먹고 사람은 그 고기를 먹는다는 정서가 유목민들에겐 아직도 보편적이다. 소련 간섭기에 고기와 야채를 한 접시에 담아 내오는 이른바 서양식 식단이 들어왔으나 어쩜 그리도 맛이 없는지…… 물론 내 입맛에 그렇다는 얘기다. 도시와 초원을 가리..

바람의 나라 14일의 비망록 ⑥엿샛날 – 사막은 다만 고비의 일부였다.

어제 잠들기 전, 오늘 일정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심심해 죽어봐라!” 어려운 말로는 망중한.하루 종일 밥만 먹고 놀다가 저녁까지 일찍 챙겨먹고 모래언덕을 오른다고 했다.지난 일정이 빡셀수록 휴식은 더더욱 꿀맛이다. 게르를 같이 쓰는 룸메이트는 아침을 먹자마자부터 텐트를 친다 플라잉을 친다 부산을 떨더니 결국 제대로 된 작품 하나를 만들었다. 고비 초원에 그늘을 만들어 눕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상쾌함인지는… 정말, 안 해봤으면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아무 것도 안 하는 편안함.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어도 더 격렬하게 아무 것도 안 하고 싶다던 누구처럼, 정말 아무 것도 안 할수록 좋다. 이대로 좋다.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문득 두렵다.그래서 까르페디엠이라지 않던가? 오늘을 기억하고 싶..

바람의 나라 14일의 비망록 ⑤닷샛날 – 공룡의 땅 바얀자끄

이곳은 몽골의 그랜드캐년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이런 별칭은 분명 한국인이 붙였을 게다. 유난히 ‘한국의 ○○’를 좋아하는 버릇을 전가의 보도처럼 몽골에 와서도 공유하는 게 아닐까 하는…물론 근거 없는 내생각일 뿐이다.예전에 바다였던 땅이 솟아올라 거대한 평원을 이루었다. 몽골의 바람은 평원을 깎아서 날려버릴 만큼 강했지만 바람보다 강한 자끄나무가 뿌리로 흙을 움켜쥔 부분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남았다. 자끄나무는 염분 토양에 적응한 식물이다. 이곳 바얀자끄처럼 수분이 별로 없는 땅에서 굳세게도 수백년을 살기도 한다. 그렇게 자라도 높이는 3m 남짓이라고 하니 그 목질이 얼마나 단단하겠는가? 고목의 경우 도끼나 톱으로는 자끄를 자를 수가 없다고 한다. 강인함에서는 바람서리 불변하는 우리 소나무보다 한수 위인 ..

바람의 나라 14일의 비망록 ④넷째 날 – 독수리골짜기를 필마로 들어서니

아침밥 먹고 바로 자는 사람, 그늘에 기대 앉아 책을 읽는 사람, 찬물에라도 머리만은 감아야겠다고 샤워장으로 향하는 사람, 잔을 부딪치며 아침부터 한잔 하는 사람, 챙 넓은 모자 하나 걸치고 지평선 너머 한 개 점이 되어 사라진 사람…어제는 달렸으니 오늘 오전은 각자의 방식으로 꿀맛 같은 휴식이다. 놀랍게도 나는 이 다섯 가지를 오전에 다 해 봤다.한잔 더 하고픈 유혹을 모질게(?) 뿌리친 채 지평선을 바라보고 길을 나섰다. 비를 뿌리는 먹구름과 청명한 하늘이 마치 합성한 화면처럼 한 시야에 들어온다. 화면을 향해 앞으로 걸어가면 내 어릴 적 로망을 이룰 수 있을까? 몸의 절반만 비를 맞게 되는 지점에 서 보게 될까?그야 어쨌든 오늘 오후에는 말을 타야 하니까 비가 많이는 안 왔으면 좋겠다.나의 바람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