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상처를 기억하고 반성하자는 박물관.
이렇게 말하면 거의 반사적으로 전쟁기념관을 떠올리겠지만 금년 호국의 달에는 조금 다른 각도의 호국 기념관을 다녀왔다.
전쟁의 폭력이 짓밟은 인권, 그중에서도 여성인권, 또 그중에서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인권 문제를 다루고 있는 박물관이다.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서울 성산동 주택가에 위치하고 있다. 골목으로 들어가서야 찾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아주 외진 곳은 아니다.
2층 양옥 전체를 전시관으로 리모델링했다. 지상 2층, 지하 1층의 가옥 뼈대와 구조는 그대로 가져왔고 외부(건물 스킨)는 완전히 바꿨다. 어두운 톤의 비둘기색 벽돌로 건물 전체를 둘러싸면서 출입문과 베란다 일부만을 창과 문으로 노출시켰다. 질서 있게 가로로 돌출된 벽돌 줄무늬가 인상적이다. 아마도 전쟁 피해나 여성인권과 관련하여 무슨 메시지를 담았겠지 싶은데 대번 와 닿는 어떤 것은 없었다. 그냥 ‘범상치 않구나!’ 정도의 느낌이랄까?
건물의 가장 외진 곳에 박물관의 입구가 있다. 마치 거대 왕릉으로 들어가는 작은 입구 같아서 분위기는 조금 음습하다.
철문을 열고 들어서면 안내와 입장권 판매 기능을 하는 작은 맞이방이 나온다. 입장권의 뒷면을 보면 할머니 한분의 사진과 간략한 프로필이 적혀 있다. 요일별로 서로 다른 할머니가 인쇄돼 있다고 하는데 내가 구입한 입장권에는 배봉기 할머니가 계셨다. 1943년 충남 예산에서 오키나와의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갔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지난 1991년 오키나와에서 생을 마감하셨다.
맞이방의 한쪽 벽면에 설치된 조그마한 스크린에는 노랑나비가 날아다니는 영상물이 상영된다. 노랑나비의 숫자가 많아지고 날갯짓도 바빠지면서 나비가 스크린의 프레임 밖으로 날아간다. 폭력과 차별의 벽을 뚫고 자유로이 날아가는 나비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상징한다. 노란색과 나비는 본 박물관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또 다른 문을 열고 건물 밖으로 나가면 쇄석길이 나온다. 쇄석(碎石), 즉 부순 돌로 깔아 만든 자갈길이라는 뜻이다. 쇄석길은 ‘역사 속으로’라는 부제가 붙은 관람 통로이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저벅저벅 소리가 나는 굵은 자갈이 바닥에 깔려 있고 스피커에서는 군인들이 행군하는 군화발 소리가 들린다. 지나간 시간 속의 군화발 소리, 그리고 지금 내 발 밑의 자갈 밟는 소리. 과거와 현재의 이음이랄까?
한쪽 벽면에는 어린 소녀를 상징하는 그림자 형상이, 맞은편 벽면에는 고통 속에 늙어버린 할머니들의 얼굴과 손바닥이 있다. 할머니들의 실제 얼굴과 손을 본떠서 만든 부조라고 한다.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면 좁고 어둡고 천장도 낮은 공간이 나온다. ‘그녀의 일생’이라 이름 붙은 이곳은 전쟁터와 위안소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할머니의 육성으로 들려주는 영상증언 코너가 있고 그 옆에 작은 창고 같은 방에도 무언가를 전시해놓았다. 어른 어깨보다 좁은 쪽문으로 연결돼 있는데 들어가라고 만들어 놓은 문은 아니다. 몸을 기울여 들여다보는 창문 정도의 기능을 한다. 여기도 마찬가지로 왼쪽 벽면엔 어린 소녀가, 맞은 편 오른쪽 벽면엔 할머니가 그려져 있다.
소녀와 할머니 사이의 앞쪽 벽면에는 전쟁을 상징하는 영상물이 돌아가고 이 세 벽면이 이룬 가운데 공간에는 메시지가 분명한 미술 작품이 설치돼 있다. 굵은 자갈이 깔려 있고 신발 두 켤레가 띄엄띄엄 놓여 있다. 할머니들이 걸어온 인생험로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하에서 2층까지 올라가는 계단 벽면의 이름은 호소의 벽이다. 시멘트블록으로 쌓아올린 막벽돌이 마감 없이 그대로 노출돼 있고 그 사이사이에 할머니들의 호소가 적혀 있다. 일부는 영어와 일어로도 함께 적혀 있다.
‘우리에게 일어난 그 진실은 우리가 죽는다고 묻히는 게 아닙니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집니다.’
‘우리 아이들은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야 합니다.’
‘한국여성들 정신 차리시오. 이 역사를 잊으면 또 당합니다.’
‘내가 바로 살아있는 증거인데 일본정부는 왜 증거가 없다고 합니까?’
호소의 벽을 따라 2층까지 올라가면 역사관, 운동사관, 생애관, 추모관이 이어진다. 관이라고 이름 붙였지만 격실은 아니고 개별 전시존을 말한다.
2층은 눈에 익은 보통의 박물관 형태로 구성돼 있다. 설명글과 관련 유물 전시로 꾸민 공간이다. 비교하자면 앞서 지나온 전시 공간들에는 설명글이 적혀 있지 않았다. 입장권을 구입할 때 나눠준 오이오가이드가 설명 패널의 기능을 대신했던 거다. 오디오가이드는 해당 부스의 번호를 누르면 이어폰으로 설명이 들리는 라디오로서 작품 설명이 필요한 미술관에서 흔히 보는 매체다.
2층 전시실에서는 위안부의 존재를 증명하는 수없이 많은 증거물들을 확인할 수 있다. 신문 모집 공고, 부대 내 자료, 군 간부의 일기장(아버지의 일기장을 기증한 일본인도 있음), 위안소의 위치가 표시된 지도, 위안소 내 배치도, 위안소에서 사용하던 위안권 등이 전시돼 있다. 더불어, 피해자 할머니들을 정의하는 호칭은 무엇일까에 대해서도 적혀있다. 할머니들의 실체는 성노예이다. 하지만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명칭은 일본군 ‘위안부’이다.
위안부는 가해자들이 사용했던 가치중립적 용어라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지만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위안부에 작은따옴표를 적고 일본군 ‘위안부’, 이와 같이 사용한다.
3D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소녀 이야기’ 코너도 있다. 위안부 피해자 정서운 할머니의 실화를 엮은 작품인데 이제는 널리 알려져서 인터넷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영상물이다.
2층 전시의 메인 코너인 운동사관이 이어진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세상이 다 아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1991년 이전까지는 가해자도 없고 피해자도 없는, 떠도는 전설 같은 이야기였다.
가해자는 가해 사실을 부인하고 피해자는 피해 사실을 감춘 채 숨어 지내왔다. 그러다가 故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증언이 있었다.
“내가 위안부 정신대다.”
1991년 8월 14일, 이날을 세계 위안부의 날이라 부른다. 김학순 할머니의 눈물은 침묵을 깨뜨리는 시작이었다.
‘나도 정신대였다.’ 고통 속에 숨어 지내던 피해자 할머니들 234명이 노랑나비가 되어 세상 밖으로 날아들었다. 그 후 몇 분의 추가 증언을 포함하여 여성가족부에 총 239분이 등록했고 현재(2018. 4. 23. 기준) 28분의 할머니가 생존해 계신다. 이들의 평균 연령은 이미 91세를 넘겼다.
김학순 할머니를 계기로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우리나라는 물론 국제적으로 공론화되었고 그 다음해인 1992년 1월 8일 수요일에는 일본대사관 앞에서 ‘위안부 강제연행 사실을 인정하라’는 시위가 열렸다. 이 날을 1차로 해서 매주 수요일 12시 일본대사관 앞에서는 수요시위가 열리고 있다. 지난 2011년 12월 14일에는 제1000차 수요시위에 맞추어 평화비 제막식이 있었다. 평화비의 기념조형물이 바로 그 유명한 소녀상이다. 어느 일본인이 말뚝 테러를 해서 더욱 많이 알려지기도 했다. 6・13 지방선거가 있었던 지난 주 수요일에도 1339차 수요시위는 어김없이 계속됐다.
시위가 일본정부에 요구하는 사항은 다음 7가지이다.
①전쟁범죄 인정 ②진상규명 ③공식사죄 ④법적배상 ⑤전범자 처벌 ⑥역사교과서에 기록 ⑦추모비와 사료관 건립.
이중 받아들여진 것은 하나도 없다. 이런 내용이 운동사관에 전시돼 있다.
다음 코너는 생애관. 피해자별 프로필을 적어놓은 곳이다. 출생년도, 연행된 지역, 피해 내용, 관련 유품 등이 전시돼 있다.
2층에서 문밖으로 나가면 추모관이다. 리모델링 전에는 주택의 베란다 공간이었을 걸로 보인다. 돌아가신 할머니들의 사진과 함께 기일이 적혀 있고 헌화할 수 있는 꽃이 준비돼 있다.
1층으로 내려오면 ‘세계분쟁과 여성폭력’ 코너가 이어진다. 콩고내전, 아프간 전쟁 등 세계 각지에서 여전히 전쟁과 성폭력 피해를 입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시하고 있다.
안내도에 자료실이라고 표시된 공간이 있는데 본래 용도는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현재는 기획전시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기획전시실은 실내와 야외에 각각 한 곳씩 마련돼 있다. 동굴처럼 안으로 움푹 들어간 야외 기획전시실은 저택의 주차장 공간이었을 걸로 짐작된다.
이름은 기획전시실이지만 이곳은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과 여성 폭력에 관한 ‘사실상’의 상설전시공간이다.
새로 알게 된 사실과 부끄러운 이야기들이 너무 많다. 특히 베트남 곳곳에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기록한 일명 ‘한국군 증오비’가 세워져 있다는 얘기는 충격적이다.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비문의 구체적인 내용은 더 놀라웠다. ‘1966년 2월 26일, 미제의 지휘 아래 꼭두각시 한국군들이 380명의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했다.’
다음은 베트남 피해 여성의 글이다. ‘우리는 아시아의 전쟁이 낳은 같은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분들은 일본군에 피해를 당했고 우리는 한국군에 당했다는 것이지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글도 보인다. ‘베트남 여성이 한국군 때문에 우리와 같은 고통을 겪었다니 한국 국민으로서 죄송합니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살아있는 동안 조금이나마 위로받을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전쟁 당시 한국군 기지에 감금된 채 성폭행을 당했던 모녀의 사진과 이야기가 걸려 있다.
‘나이 든 여성들은 두어 번, 젊은 여자들은 계속해서 불려나갔다. 몇 번을 불려나갔는지 모르지만 2박 3일 동안 하룻밤에 7~8번 정도 불려나갔던 것 같다. 함께 갇혀있던 엄마는 우리들이 불려나갈 때마다 흐느껴 울며 부처처럼 기도를 했다.’
박물관 밖으로 나가면 관람객들의 사연을 적어놓은 노랑나비 수백 마리가 건물 벽면에 걸려 있다. 내용은 할머니들에게 용기를 전하는 응원의 메시지들이다.
주로 ‘잊지 않겠습니다.’는 내용들이고 ‘꼭 이길 수 있습니다. 건강하세요.’, ‘진실은 결코 가릴 수 없습니다.’ 등도 눈에 띈다.
이 박물관에서는 소녀와 할머니를 대비한 사진이나 그림, 조각 등을 꽤 여러 번 확인할 수 있다. 소녀와 할머니 사이의 약 50년 간극은 일본군의 성노예로 고통 받던 시간과 막상 전쟁이 끝났음에도 자신의 피해 사실을 마치 죄인처럼 숨긴 채 살아왔던 또 다른 고통의 시간을 합한 시간이다. 이 폭력과 단절의 시간을 전후로 해서 그 이전에는 소녀가 있고 그 이후에는 할머니가 있다는 설정은 본 박물관 스토리의 기본 뼈대를 이룬다.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은 지난 2012년에 개관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박물관을 짓자는 논의가 나온 뒤 실제로 개관할 때까지 근 20년이 걸렸다.
후원기업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기업들 입장에서는 위안부 혹은 정신대가 한정하는 이미지나 정체성이 부담스러웠나보다. 정부나 지자체도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말리진 않겠지만 나한테 나서라고 하지는 마!’ 이런 입장이 아니었을까?
그래서일까? 위안부박물관이나 정신대박물관이 아니라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 단지 전시소재의 외연을 넓힌다는 차원만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다.
결국 건립 예산은 시민 모금으로 많은 부분을 충당했다. 그들의 이름은 박물관 2층 ‘기부자의 벽’에 적혀 있다.
우리나라 시민의 모금이야 새삼스러울 게 없지만 놀라운 것은 일본시민이다. 알려지기로는 전체 건립 기금의 약 30%가 일본인의 기부금이라고 한다. 일본이라는 나라와 일본사람이라는 구성원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일본을 갈 때마다 느꼈던 것은, 이렇게 겸손하고 예의바른 사람들이 어떻게 과거에 그런 만행을 저질렀고 지금도 저렇게 뻔뻔스러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다.
혼네(本音; 진심)와 다떼마에(建前; 겉치레)라는 일본인의 이중성에서 기인하는 바도 있겠지만, 결국 일본의 집권 세력이 보편적인 일본국민 정서를 대변하지 못한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그렇게 믿고 싶다.
건립 모금 과정이 안타깝고 부끄럽기도 하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오히려 시민모금을 통해 더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성과물로 만들어냈다고 바라 볼 수도 있겠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 지난 2012년 5월 5일 개관했고 현재 (사)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운영하고 있다. 일요일과 월요일에 쉬고 오후 1시에 문을 열어 6시면 문을 닫는다.
상징은 노랑나비이다. 뮤지엄샵에서 파는 노랑나비 뺏지도 예뻤지만 나는 노란 연필을 구입했다.
박물관에 걸린 사진 속의 글귀가 인상에 남는다. 수요시위에 참가한 할머니 한 분이 이런 피켓을 들고 있었다.
“우리는 쉽게 죽지 않아!”
역사의 흔적을 모두 지우고픈 사람들에게 던지는 무겁고도 무서운 외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