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뉴스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요 몇달은, 어쩌면 껍데기는 가고 알맹이만 남는 시련의 과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껍데기는 가라.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시인을 잘 모르는 사람도 그의 대표 시 <껍데기는 가라>의 몇 구절만큼은 한번쯤 들어서 알고 있을 터이다.
민족서사시인 혹은 참여시인이라 불리는 신동엽은 1930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났고 1969년 비교적 젊은 나이인 40세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시인들 중에 흔히 있듯 술을 좋아하여 간질환에 걸린 것은 아니다. 군에서 발병한 간디스토마가 문제였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언급하겠다.
신동엽은 같은 시인이자 후일 민속학자가 되는 인병선과 결혼하여 슬하에 정섭, 좌섭, 우섭, 1녀 2남을 둔다. 지난 주 소개한 짚풀생활사박물관의 설립자이자 초대 관장이 부인 인병선이고, 2대 관장이 맏아들 신좌섭이다. 신좌섭은 서울대 의대 교수이자 시인이다.
시인이 타계한 지 50년. 네이버 인물검색을 하면 개그맨 신동엽보다 뒤에 나올 정도로 옛사람이 되고 말았지만 신동엽 시인이 문학으로 저항했던 그 시대의 껍데기는 여전히 우리 곁에서 알맹이를 가리는 두터운 장막으로 남아있다. 그는 오래 전에 갔지만 그의 목소리는 아직 현재형이다.
박물관은 시인의 생가와 인접한 채로 조성됐다. 출입구는 남쪽 방향으로 냈으며 해가 비치는 동쪽과 남쪽 방향 벽의 일부를 유리면으로 처리했다.
박물관을 들어서서 처음 접하게 되는 전시물은 신동엽의 철제 흉상이다. 오른손으로 펜을 굳게 움켜쥔 모습을 통해 '민족 서사시인', '참여시인'이라 이름 붙은 삶의 궤적을 표현한 듯하다.
남쪽에서 빛이 들어오는 벽면을 따라 기다란 연표가 걸려 있다. 1930년 부여에서 태어나 1969년 작고할 때까지, 우리 나이 40세의 삶이 여덟 구간으로 나뉘어 있다.
1. 소년 신동엽과 식민지시대(1930~1945)
공부를 잘 하는 똑똑한 소년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내지(일본) 성지 참배단'에 뽑혀 보름 동안 일본을 다녀오기도 했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굶는 날이 많을 만큼 어려운 시절을 지냈다고 한다.
2. 전주 사범 시절(1945~1950)
1945년 3월에 그 어렵다는 전주 사범학교에 입학했지만, 이때는 일본이 패망하기 불과 5개월 전으로서 공부는 거의 하지 못했고 주로 전쟁 노력봉사에 강제동원됐다고 한다.
1949년 7월에는 공주사대 국문과에 합격했지만 다니지 않고, 두 달 뒤 9월에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한다. 공주사대를 다니지 않은 이유는 적혀있지 않다.
3. 한국전쟁( ~1953)
한국전쟁이 터지고 부여에 머물던 신동엽은 인민군 치하에서 민청 선전부장을 역임한다. 이때의 이력을 근거로 신동엽에게 빨갱이 딱지를 붙이는 사람들도 있다. 인민군이 물러간 뒤에는 국민방위군에 소집되어, 이때 얻은 병으로 평생을 고생하게 된다. 국민방위군에 소집됐다가 죽을병을 얻은 사람들은 숱하게 많았다고 한다.
일명 국민방위군 사건은 '한국전쟁 최대의 부정부패 스캔들'이다. 방위군의 고위 간부들이 국고금을 횡령하고 부정착복하는 바람에 병력들에게 방한복을 비롯한 숙식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서 소집병력 50만 명 중 무려 9만 명이 아사 내지는 동사하게 된다. 이 사건을 미온적으로 처리하는 과정에 실망한 이시영, 조병옥, 윤보선, 김성수 등이 이후 이승만과 결별하게 됐을 정도로 파장이 매우 큰 사건이었다. 일부에서는 군입대 기피현상의 근원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국민방위군 시절 신동엽은 민물게를 생으로 잡아먹고 간디스토마가 생겨 평생을 고생하다 나중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4. 풀잎사랑
한국전쟁 기간 중인 1953년 서울 돈암동 헌책방에서 운명의 연인, 인병선을 처음 만나게 된다. 문학하는 사람들은 만나는 장소도 남다르다.
1957년에는 인병선과 결혼하고 부여 생가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다. 화가로 알려진 맏딸 신정섭이 같은 해에 태어난다.
5. 신춘문예 등단(1959)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입선되며 등단한다. <진달래 산천>도 이 해에 발표된다.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는 입선 조건이 있었다. 아래 소절을 삭제해야 했다. 권력이 손대기 이전에 문단이 먼저 자체검열을 한 셈이다.
투구를 쓰고 싶어하는 자 쇠항아릴 만들어 씌워주라
사람을 죽이고 싶어하는 자 영웅이 되고 싶어하는 자
로케트에 메달아 대기밖으로 내던져 버리라
6. 시인의 길(1960~1966)
30대 기혼의 신동엽은 서울 명성여고 교사로 재직하면서 첫 시집「아사녀」를 발표하고 본격적인 시인의 길을 걷게 된다. 그후 서울 동선동으로 이사를 오고 타계할 때까지 이 집에서 살게 된다.
7. 껍데기는 가라(1967)
이후 참여시라 이름 붙은 많은 작품들을 발표하는데 이 중 백미는 1967년 발표된 <껍데기는 가라>이다.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평론가들이, 시인 신동엽의 놀라운 역사적 혜안을 말하며 자주 인용하는 구절이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역사학자들조차 동학농민항쟁, 삼일운동, 4·19혁명을 같은 맥락의 역사로 인식하는 시각은 갖추지 못했다고 한다. 문학하는 사람의 역사인식이 여기에까지 미쳤다는 점이 놀라울 뿐이다. 이런 사람을 선각자라고 한다.
8. 서사시 <금강>, 향기로운 흙가슴만 남고(1967~1969)
같은 해에 대서사시 <금강>을 발표하고 이후 작품 활동을 계속하다 1969년 타계한다.
우리는 신동엽을 민족서사시인이라고 평한다. 신동엽 이전에도 우리 역사에 근거한 서사시를 적은 시인들은 많았지만 대부분 막연하고 추상적이고 수묵화 같은 느낌이었다면, 신동엽에 이르러 민족의 현실에 토대를 박고 구체적인 언어로 역사를 노래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다른 시세계를 보여주었다.
1967년 발표한 ‘종로5가’를 원시로 한 안치환 노래 ‘시인과 소년’
연표의 맞은편에는 단일 공간으로 구성한 전시실이 자리 잡고 있다.
벽면에 매입한 진열장 속에는 육필원고를 비롯한 생활 유품, 맏딸 신정섭 화가가 그린 아버지의 초상화 등이 들어 있고 진열장과 마주 보고 있는 벽면에는 그의 대표 작품들이 간단한 설명과 함께 적혀 있다. 한 문학가의 생활 소품들을 살뜰하게 모아놓은, 꽤 내공이 깊은 전시실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가독성에 대한 배려가 적다는 점이다. 글을 적어놓은 위치가 높거나 낮은 것은 관람객이 편하게 읽기에는 제약 요소가 된다. 그 중에 특히 진열장 배치는 아무리 살펴봐도 이해하기 힘들다.
바닥에서 1,200 정도, 사람 허리 높이의 독립진열장 속에 전시물이 들어 있고 설명이 잔뜩 적혀 있는데 기울기가 없이 수평으로 누워 있는 바람에 이걸 제대로 읽을 재간이 없다.
더 놀라운 점은 정면으로 '껍데기는 가라' 본문이 적혀 있고 옆에 작은 글씨로 작품을 해설해 놓았는데 이걸 읽기는 더 힘이 든다. 옆구리를 90도로 꺾어야 비로소 읽을 수 있다.
전시실의 다른 부분을 보면 분명히 전문가의 작품 같은데, 전시물의 가독성 면에서 보면 도저히 전시하는 사람이 만든 것 같지가 않다. 아무튼 껍데기는 가야 할 것 같다.
문학관답게 북카페도 마련돼 있다. 지금껏 가본 문학관 부설 북카페 중에 가장 아기자기하고 쾌적하고 예쁜 공간이다. 전시 다 봤다고 바로 나가지 마시고 천천히 차 한 잔 하면서 그냥 앉았다가라도 가실 것을 권해드린다.
신동엽문학상 수상자들이 적혀 있는데 대단히 익숙한 이름들이다.
이문구, 김성동, 현기영, 도종환, 김남주……
계단이 섞인 야트막한 경사길을 따라 건물 옥상에 오르면 잔디와 보도블록이 교차되는 아기자기한 미로 같은 마당이 나온다. 건물의 후원을 대신하는 공간이라고 생각된다.
유명 건축가의 작품이니까 여기에도 뭔가 의미를 담았겠지만 내 식견 범위에선 바로 어떤 느낌이 와 닿지는 않았다.
전시실에 소개된 시 중에 대단히 참신한 작품이 있어서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산문시Ⅰ>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데거 럿셀 헤밍웨이 장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오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개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 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쪽 패거리에도 총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내는 미사일기지도 땡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사색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월간문학 68년 11월 창간호」
스칸디나비아라고 해서 이런 나라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보편적인 복지를 이룬 사회, 탈권위 사회를 표현한 작품으로서 억압적인 권위를 거부하는 시인의 유토피아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더불어, 국민들은 제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갖는다는 말이 오랜 진리처럼 와 닿는다.
현실의 뼈대 위에서 도무지 현실적이지 않은 상황들을 전개시킨 구성에서 G. 마르케스의 소설「백년 동안의 고독」이 겹친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