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 전에 조선의 도읍이 된 한양을 둘러싼 18.6km의 성곽.
바로 이 한양도성이 오늘의 전시 소재이다.
박물관의 이름은 한양도성박물관. 한양도성의 낙산구간에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은 목동으로 이사 간 이대병원이 있던 자리이다. 이 건물의 1, 2, 3, 세 개 층을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화동 지나 종로6가 쪽에 1층 정문이 있지만 동선상으로는 동대문성곽공원 쪽 3층으로 진입하는 것이 더 낫다. 주 전시실이 3층이기도 하고, 3 ⇨ 2 ⇨ 1층으로 내려오는 하향 동선을 따라가는 것이 관람에도 더 편하다.
도성은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되었다지만, 두 가지 기능 중 뒤의 것은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다. 알려진 것처럼 선조와 인조 임금께서는 각각 임진, 병자, 양란을 맞았을 때 도성을 활용해 수성전을 벌이는 대신 저어 멀리들 ‘작전상 후퇴’를 택했다.
그 덕에 임진왜란 당시 왜장 가토 기요마사는 숭례문을 통해, 고니시 유키나가는 흥인지문을 통해 성벽에 총탄 자국 한번 내지 않고 개선하듯 한양으로 입성했다. 그후 300년이 지난 일제강점기에 도로 확장을 핑계로 성문을 헐어버릴 때에도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왜장들의 개선문이었던 덕에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었다.
이처럼 방어에는 무능했던 반면,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는 기능은 확실했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이나 영화를 보면 이런 대사가 흔히 나온다.
‘그자들이 아직 도성을 빠져나가지는 못 한 것으로 보입니다.’
‘역적들이 도성 밖 30리까지 포진했다 하옵니다.’
이처럼 도성은 한성부를 구획 짓는 확실한 경계로서, 18.6km의 성곽 안쪽이 소위 사대문 안, 원서울이 되는 거다.
따라서 한양도성은 성이라기보다는 높은 담장이었던 셈이다. 그래서인지 영문 명칭도 Seoul Castle(혹은 Hanyang Castle)이 아니라 Seoul City Wall이다.
500년 이상을 유지하던 도성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훼손되기 시작한다. 도심에 차가 다니면서부터 성벽은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일 뿐이었다. 좌우 성벽이 헐린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찻길 가운데 섬처럼 고립된 누각으로 남게 됐다. 일제의 도시계획에 따라 돈의문(서대문), 소의문(서소문), 혜화문(동소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남산 성벽을 허문 자리에는 조선신궁을 짓고 이간수문과 주변 성벽을 허문 자리에는 경성운동장을 조성했다.
그후 개발시대를 거치면서 필요에 따라 국가에서 헐고, 민간(경신중고 교사 이전 등)에서도 헐고, 자연 멸실되기도 하면서 1970년대까지 전체 18.6km의 약 3분의 1인 6.7km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남은 구간도 산속에 남은 것을 제외하고는 주택을 짓는 축대로 활용된 경우가 많았으니 이땐 이미 성벽이 아니었다.
이후 1970년대부터 본격화된 복원, 보수 사업을 통해 2018년 현재 전체 구간의 약 72%인 13.3km 구간이 온전한 모습을 갖추었다. 나머지 5,3km 구간(정확히는 5,257km)은 도로나 건물로 단절된 통에 당분간은 복원이 불가능하여 바닥에 흔적 표시를 하는 걸로 대신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수난을 겪었음에도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전세계의 수도 성곽 중 길이가 가장 길고(13.37km) 성의 역할을 했던 기간도 가장 길다는(514년; 1396~1910) 점.
한국인들이 열광하는 세계 최고에 두 개 추가요!
축조, 보수, 훼손, 복원으로 이어지는 600년의 지난한 역사를 이제 박물관에서 살펴보자.
추천한 대로 3층으로 진입하면 처음 나오는 공간이 제3전시실 – ‘한양도성의 훼손과 재탄생’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근대도시화의 숙명으로, 혹은 악의적인 식민지 정책에 따라 도성이 훼손돼 가는 과정을 살필 수 있다.
도성의 평지 구간은 이때 거의 멸실됐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다. 다만, 산지 구간은 많이 훼손되지 않았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비교적 온전했던 산지의 성벽도 해방 이후 전쟁과 도시화를 겪으면서 도로에 뚫리고 건물에 헐리고 거주지의 축대로 내어주면서 깊은 산속 구간을 제외하고는 빠르게 훼손되어 갔다. 그러면서 동시에 보수와 복원도 함께 진행되어, 이 시기는 말 그대로 ‘병 주고 약 주던’ 때로 기억된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을, 마치 일지(日誌)를 살피듯 영상물을 통해 관람할 수 있다.
같은 층의 이웃한 전시 공간은 제2전시실 – ‘한양도성의 건설과 관리’이다.
조선왕조가 개창되고 도성 축조가 논의되는 과정부터 건립과 완공, 그리고 보수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이 관련 사료를 중심으로 전시돼 있다.
전시에서는 1394년(태조 3년)의 실록을 인용하고 있다.
종묘는 조종(祖宗)을 봉안하여 효성과 공경을 높이는 것이요,
궁궐은 국가의 존엄성을 보이고 정령을 내는 것이며,
성곽은 안팎을 엄하게 하고 나라를 굳게 지키려는 것으로,
이 세 가지는 모두 나라를 가진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층을 내려오면 기획전시실과 도성정보센터를 이용할 수 있다. 도성정보센터는 개가식으로 운영하는 작은 도서관이다. 출입구가 사무실처럼 생겨서 들어가 봐도 될까를 망설이게 되는데 과감히 문을 열고 들어서면 꽤 좋은 선택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편안하게 책 읽기 좋은 시설이다.
한 층을 더 내려오면 제1전시실 – ‘서울, 한양도성’이다. 한양도성에 대한 도입부 성격의 전시 공간으로서 전시 스토리로 보자면 맨 먼저 이곳을 보고 ‘건설과 관리(2전시실)’, ‘훼손과 재탄생(3전시실)’을 관람하는 것이 순서이겠으나 역순으로 보아도 나름의 스토리는 충분하다.
로비 벽면에는 ‘도성 서울을 품다’라는 파노라마 영상이 걸려 있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옛그림과 구한말 선교사나 사진 기자들이 찍은 옛사진과 현대의 풍경을 담은 동영상을 조합하여 만든 미디어아트 작품으로서 한양도성의 과거 모습, 발굴과 복원 과정, 그리고 현재의 서울 풍경을 시간 순으로 담았다.
박물관 관람을 마쳤다면 내친 김에 성곽길 걷기를 시도해보는 것도 괜찮다. 물론 하루에 걷기는 쉽지 않다. 구간을 나누어 중장기(?) 계획 하에 성곽길 완주에 도전해보는 것은 어떤가?
성곽길 걷기를 순성(巡城)이라고 하는데, 이는 옛사람들의 소박한 여흥이기도 했다.
정조 때의 실학자 유득공의 글(아래)을 읽어보면 순성의 풍경은 오늘날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도성의 둘레는 40리인데, 이를 하루 만에 두루 돌면서 성 안팎의 꽃과 버들을 감상하는 것을 좋은 구경거리로 여겼다. 이른 새벽에 오르기 시작하면 해질 무렵에 다 마치게 되는데 산길이 험하여 포기하고 돌아오는 사람도 있다.」
글을 읽다가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저 시절 사람들도 하산해서 막걸리 마시는 재미로 순성을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