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시훈의 테마기행/2016~20년

바람의 나라 14일의 비망록 ④넷째 날 – 독수리골짜기를 필마로 들어서니

kocopy 2025. 3. 1. 10:46

아침밥 먹고 바로 자는 사람, 그늘에 기대 앉아 책을 읽는 사람, 찬물에라도 머리만은 감아야겠다고 샤워장으로 향하는 사람, 잔을 부딪치며 아침부터 한잔 하는 사람, 챙 넓은 모자 하나 걸치고 지평선 너머 한 개 점이 되어 사라진 사람…
어제는 달렸으니 오늘 오전은 각자의 방식으로 꿀맛 같은 휴식이다. 놀랍게도 나는 이 다섯 가지를 오전에 다 해 봤다.

한잔 더 하고픈 유혹을 모질게(?) 뿌리친 채 지평선을 바라보고 길을 나섰다. 비를 뿌리는 먹구름과 청명한 하늘이 마치 합성한 화면처럼 한 시야에 들어온다. 화면을 향해 앞으로 걸어가면 내 어릴 적 로망을 이룰 수 있을까? 몸의 절반만 비를 맞게 되는 지점에 서 보게 될까?

그야 어쨌든 오늘 오후에는 말을 타야 하니까 비가 많이는 안 왔으면 좋겠다.
나의 바람과는 달리 욜인암엔 오후 내내 비가 내렸다. 욜인암은 ‘욜’이라 불리는 수리가 살고 있는 골짜기란 뜻이다. 오랜 세월을 두고 빙하가 깎아 만든 협곡인데 골짜기 안쪽으로 들어가면 일년 내내 녹지 않는 얼음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아니,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엔 8월 중순쯤 되면 얼음이 모두 녹는다고 한다. 그래서 얼음 구경은 포기하고 말을 타고 골짜기만 들어갔다 나왔다.
욜인암에서 말타기는 개인적으로 비추다. 차가 못 들어가는 골짜기를 말을 타고 들어간다기에 원초적인 낭만을 기대했지만, 줄서서 놀이기구 타고 온 기분만 남았다. 차라리 허브 향내 맡으며 걸어서 다녀오는 편이 낫다. 말은 역시 평원에서 타야 한다.

욜인암 입구에 자연사박물관이 있는데 이곳에 서식하는 온갖 종류의 동물들을 박제로 전시하고 있다. 학교에 있는 교보재 보관소 수준의 초보적인 전시시설이지만 박제는 제법 잘 만들어 놓았다.
인상적인 것은 박물관 입구에 늘어선 경계석이 다름 아닌 진품 공룡알 화석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에나! 보존설비 갖춘 진열장 안에 고이 모셔도 모자랄 판에 사람들 발에 차이는 경계석이라니?
흔하니까 그럴 것이다. 부잣집 아이들이 보석으로 공깃돌 놀이를 하는 격이랄까?

욜인암에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올 때는 없었던 얕은 내를 건너야 했다. 고비의 초원에 비가 내리면 강이나 호수가 생겼다가 하루 만에 없어지는 일이 다반사다. 바람에 날릴 정도로 곱디 고은 점토라서 비가 와도 땅에 스미질 못한 채 한 곳에 고이거나 경사를 따라 흐르는 것이다.

차바퀴가 물에 빠져 밤새 애먹이는 일도 흔하다지만 별로 걱정이 되진 않았다.
어제 배웠지 않나!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몽골에선 주게르 주게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