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시훈의 테마기행/2016~20년

바람의 나라 14일의 비망록 ②도착 이튿날 – 사서고생 그리고 풍찬노숙

kocopy 2025. 3. 1. 10:31

남고비로 향하는 여정의 첫날이다.
전체 일정을 이끄는 소설가 이시백 선생은 금번 여행을 네 글자로 하면 ‘사서고생’, 한자로는 ‘풍찬노숙’이라고 일러주었다.
풍찬노숙에 화장실이 따로 있을 수가 없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남녀가 유별할 뿐이다. 저쪽 편은 남자, 이쪽 편은 여자. 서로 고개 돌리기 없기. 고개 돌렸다가는 그 자리에서 소금기둥이 될 거라는…

"뭘 그리 멀리 갔어?"
"넘덜이 볼까봐"

"빨리 와. 차 출발한대"

**두 분은 부부다.


300km도 안 되는 거리를 점심시간 포함 무려 8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바끄가즐링촐로(Бага Зэрлэг Чулуу). 낮은 바위분지라는 뜻으로 가로로 판상절리를 이룬 높고 낮은 바위산이 뭔가 영험한 기운을 뿜어낸다. 이곳은 몽골초원에서 크게 떨쳐 대제국을 이뤘던 훈족의 근거지라고 한다. 훈족은 흉노(匈奴)를 말한다. 천한 오랑캐라는 뜻? 알다시피 중국은 상대를 좋은 말로 불러주질 않는다. 몽골도 굳이 몽고(蒙古)라고 부르는데 몽매하고 낡은 족속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몽골에서는 몽고라고 발음하지 않는 것이 이 사람들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

민박지에 도착해서 게르(몽골 가옥)에 몸을 던지니 생각보다 훨씬 아늑하다.
씻을 물도 없지만 안 씻어도 습도가 낮아 직사광선만 피하면 별반 불쾌하지는 않다. 게다가 바람까지 불어주니 이것은 바로 몽골 특산 노천 바람탕!
이제 초원에 해가 진다.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가로로 붉게 물들이는 저녁노을은 지평선을 못 보고 사는 도시인들에게는 넋을 빼놓을 정도의 감동이다.

지는 노을에 감동했던 사람들이 ‘레드썬!’ 이후 주섬주섬 품에서 보드카와 맥주를 꺼내 놓는다. 오늘은 고비 일정의 첫날 저녁이니 간단한 자기소개가 이어진다. 오늘을 위해 몇 년을 별렀노라고, 휴가 일정 협상불발로 회사까지 그만 뒀노라고, 이시백 작가 말마따나 몽골 일정에 참여한 사람들은 일단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았다.
보드카와 맥주를 섞어 마시며 자기소개가 거의 막바지에 이를 때쯤, 웃는 인상이 좋은 어떤 여자분의 순서가 돌아왔다.
“저는 초원에 비가 내리면 그 비를 맨몸으로 다 맞고 싶어서 몽골에 왔어요.”

기우제까지야 지낼 일은 아니지만, 내일 동틀 무렵엔 메마른 초원을 적시는 비가 한번 내렸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