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면 만리장성 넘어 말을 달려오는 야차 같은 도적떼들.
정착지에서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북쪽의 유목민은 공포의 악귀일 수밖에 없다.
하늘이 높아졌다는 것은 이제 곧 혹독한 겨울을 견뎌낼 물자를 마련할 때가 가까워졌음을 의미한다. 말이 살쪘다는 것은 봄과 여름을 지나며 풍족한 초지에서 배를 불린 말들이 언제든 내달릴 준비를 마쳤다는 뜻이다.
화북지방 농경민들에게 하늘이 높고 말이 살쪘다(天高馬肥)는 것은 풍요로운 가을의 낭만이 아니라 예고된 재앙을 앞둔 공포였던 것이다.
도대체 유목민은 왜 농경민을 약탈하는 것일까? 태생적으로 호전적이어서?
틀린 말은 아니다. 거친 자연환경에서 나고 자란 탓에 적자생존의 결과로 강해질 수밖에 없는 그들이 맞장뜨기에 능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개별 전투력 면에서 농경민은 유목민의 상대가 못 된다.
그렇다고 잠재된 호전성을 해소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약탈을 해왔다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제의 핵심은 자급자족 여부이다. 농경과는 달리 완벽한 자급자족이 불가능하므로 주변 농경민들과 끊임없이 교류를 해야만 하는 것이 유목생활이다. 모피와 유제품과 고기, 혹은 가축을 주고는 곡식, 채소 등 농산물과 의복과 각종 생활도구를 받는다.
유목민은 여분이라는 것을 두지 않는다. 당장 구하지 못하면 그해 겨울엔 없는 것이다. 농경민은 거래가 성사되지 않아도 그만인 반면, 유목민은 억지로라도 거래를 성사시켜야 하는 처지이다. 억지로 성사시키는 거래가 무엇이겠나? 그것이 약탈이다.
‘이러는 내가 정말 싫어! 이러는 내가 정말 미워!’
육식을 해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는 맹수가 있었다. 거래가 안 되면 약탈하는 생활을 청산하고 안정적인 정착을 하고팠던 유목민들이 바로 그들이다. 진나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5胡는 16國을 세웠고, 징기스칸이 초원의 대제국을 이룬 후 그의 손자 쿠빌라이는 베이징에 정착했다. 정주민이 되고 싶었지만 그들은 결국 초원으로 쫓겨났다. 눈물의 퇴로에서 조상님의 말씀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그들의 조상은 왜 후손들에게 성을 쌓지 말고 끊임없이 이동하라고 당부했는지, 그것이 알고 싶어 나는 오늘 징키스칸국제공항에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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