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에 적어둔 수첩 메모입니다.
7월 13일 앞뒤로 엮어서 이른 여름휴가를 다녀와야지!
기대가 컸습니다. 안동, 예천을 비롯한 경북 북부 지역에는 고가음악회라는 문화 프로그램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던지라 꼭 한번 가보고 싶었습니다.
古家, 문화와 예술을 만나다.
이름부터가 얼마나 멋있습니까? 실제로 안동 지역 지인의 추천을 받은 적도 있었고요.
그런데...
실제로는 예천군민한마당이었습니다.
"시~~계바늘처럼 돌고 돌다가 가는 길을 잃은 사~람아~~ 미련따윈 없는 거야 후회도 없는 거야~~"

주최측의 고충은 이해합니다.
빈 자리를 놔두고 행사를 진행할 수는 없지 않느냐? 그리고 동네 어르신들을 초청했으니 그 분들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맞습니다! 저도 클래식의 고요한 선율보다는 흥겨운 트로트 리듬이 더 좋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군민한마당이라고 했어야지 왜 고가음악회라고 했나고요???
한 달 전부터 일정 잡아놓고 아내와 아이들 인솔해서 잔뜩 기대하고 찾아 온 사람은 어쩌라고?
"고객님, 마이 당황하셨어요?"
"예 황당했습니다."
군수, 국회의원, 경북도의원, 군의회의장, 부의장, 면장, 예총 예천지회장 등등 10여 명의 소개와 인사가 끝나고 다시 이어지는 '아싸아싸~~'

수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진행본부 쪽으로 가서 프로그램 좀 보자고 했습니다.
마술 하나, 플룻 연주 하나 빼고는 전부 쿵짝쿵짝이더군요.
"돌아가자!"
한 마디에 아이들이 어찌나 반가워하던지… ㅎㅎ
그래도 초간정의 절경 하나는 건졌습니다.
기암괴석 사이를 휘돌아 흐르는 계곡물에 내려 앉듯 자리 잡은 초간정은 처음 지어진 때로부터 근 400년이 흐른 고택입니다. 조선 선조 때 초간 권문해 선생이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을 편찬한 곳이라고 합니다.
듣는 시군은 기분 나쁠 수도 있겠지만 안동과 인근 시군의 문화 저력 차이를 확인했던 시간이었습니다.
13일 토요일 아침 8시 반에 집을 출발하여 맨처음 도착한 곳은 문경 가은의 드라마세트장.
산 중턱에 있는 세트장까지 걸어올라갈 수도 있지만 대부분 모노레일을 탑니다. 이거 꽤 비싸요. 어른 6000원.
참고로 태백 고한에는 공짜로 탈 수 있는 모노레일이 있습니다. 고지대에 사는 아파트 주민을 위한 편의시설이라는데 저도 그냥 한번 타봤었지요. ^^
다시 모노레일을 타고 문경석탄박물관으로 갑니다.
점촌에서 짜장면 한 그릇 먹고(맛집 코너 '서림식당' 참조), 삼강주막엘 들렀습니다.
아이스크림 파는 회사에서 운영하는 주점인 줄 알았다는 사람도 있지만 이곳은 내성천과 금천이 낙동강에 합류하는 지점, 즉 3강이 만나는 곳이라 삼강나루라 불렀다고 합니다. 경북 내륙 교통의 요지답게 나룻배와 뱃사공으로 떠들썩하던 시절부터 이곳엔 초가로 지은 주막이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나룻배는 더이상 이곳을 찾지 않았지만 마지막 주모 유옥연 할머니는 주막을 홀로 지키다 지난 2005년 90세의 나이로 삼강의 물길 따라 떠나갔습니다.
이곳이 '마지막 주막'이라는 타이틀로 세상에 알려지자 관할 예천군에서는 이곳을 아예 주막 민속촌으로 조성했습니다. 주막 앞의 회화나무는 수령 500년의 고목입니다.
글을 몰랐던 유옥연 할머니는 저렇게 흙벽 위에 외상 기록을 해두었습니다.
짧은 빗금은 막걸리 한 사발, 긴 빗금은 한 주전자라고 합니다.
저것도 일종의 문화재라서 벽은 보존처리하고 유리 덮개로 보호해 두었습니다.
삼강나루로 내려가 물 좀 튀기고 놀다가 황목근(수령 500년의 천연기념물 팽나무)도 구경하고,
군청 앞에서 맛있는 갈비살 좀 구워주고(김서방숯불가든) 숙소가 있는 금당실로 들어왔습니다.
금당실은 병화가 들지 않는다는 십승지 중 한 곳입니다. 태조 이성계가 당초 이곳에 도읍을 정하려다 앞에 큰 물이 없어서 한양으로 눈길을 돌렸다고 해서 반서울이라고도 합니다.
담장이 예쁜 마을로도 유명한데 400년 역사의 금당실송림도 산책차 걸어볼 만합니다.
우천재는 금당실 초입에 자리잡고 있는데 주인이 손도 못대는 문화재는 아니고 마루에 유리문도 달아서 편리하게 고쳐 살고 있는 한옥 고택입니다. 쥔장이 직접 담그는 장맛이 일품이라고 합니다. 조그만 그릇에 담아 주시더라고요. ^^
우천재 앞에서 귀한 구경을 했습니다.
"함 사세요!"
요즘 좀처럼 보기 힘든 함 파는 광경을 추억처럼 지켜봤습니다.
예전에 제 친구들 함 팔 때 동네 꼬마들 하드 하나씩 사주고 '함 사세요' 10번 외치라고 시켰던 기억이 솔솔 납니다. ^^
고가음악회를 갔다가 얼른(?) 돌아와서는 맥주 한 캔씩 마시고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엔 늦잠 좀 자고 9시가 다 돼서 일어났습니다. 송림 산책을 하는데 슬슬 비가 오더군요.
'오늘 불영계곡 가야되는데, 울진 쪽엔 비 안 오겠지?'
옵디다!
위험하지 않을 만큼만 옵디다!
누군가 불영계곡을 한국의 그랜드캐년이라고 했다던데, 그 절경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우산 사이로 대강 본 것만으로도 장관인 것만은 틀림없었습니다. 도로가 생기고 시설물이 생기기 전에는 정말 아찔한 협곡이었겠구나 싶었습니다.
불영계곡을 맛만 살짝 보고는 7번국도를 따라 삼척으로 향했습니다. 삼척에 사는 절친 장욱이네 집에서 저녁을 먹고 1박을 하기로 약속했거든요.
찾아만 가면 늘 동해안 산해진미로 대접해주는 친구네 집.
오늘의 메뉴는 골뱅이 데침과 멍게회와 해물탕입니다. 반가운 한잔을 기울이고, 삼척에 새로 생겼다는 이사부사자공원으로 향했습니다.
♬ 신라장군 이사부 지하에서 웃는다 독도는 우리 땅 ♪♩ 하는 그 이사부 장군을 기념해서 만든 공원입니다.
삼척시장님 별병이 '빤짝이시장'이라던데, 이 분이 새로 만드는 시설마다 온통 반짝반짝 하는 통에 그런 별명이 붙었답니다.
반짝이는 삼척의 밤을 보내며 모처럼 시원한 저녁잠을 청했습니다. 덥지도 습하지도 않은 삼척 날씨는 정말 최고로 쾌적했습니다.
우리가 출발했던 13일 아침부터 이틀간 서울 경기 지역은 폭우로 물피해도 많았다고 하던데, 우리는 이 큰비를 피해서 다녀온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의 보람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15일 새벽 5시 20분에 삼척을 나서 집에 도착한 시간은 8시 30분.
평소 같으면 8시면 도착했을 텐데 진부에서 횡성까지 평균 70km로 달린 탓에 조금 늦고 말았습니다. 비가 어찌나 퍼붓던지 도로가 아니라 자동세차기 속을 지나온 것 같았습니다.
아이들은 학교에 조금씩 지각하고 큰애는 벌로 청소까지 하고 왔답니다.
'청소가 대수냐? 지은아! 그래도 이번 여행 괜찮았지? ^^'
2013. 07.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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