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에 매화에 개나리 진달래 벚꽃 여행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어야 마땅할 이 시기에 할 일이 없어 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시의적절(?)한 책으로 골라서…
2020년, 올해의 첫 여행은 책입니다. 함께 가실까요? ^^
어떤 식으로든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을 찾아내 격리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략)… 어쨌든 치료법이 발견되거나 이 병의 발병을 예방할 수 있는 백신이 나올 때까지는 더 이상의 전염을 막기 위해 관련된 사람들을 격리하자는 것이었다. 이 병의 전염성이 일단 확인되자, 환자들은 수학에서 복비례라고 부르는 비율에 따라 증가했다.(pp.58~59.)
무섭게 퍼져나가는 전염병의 공포가 예전에 읽은 소설 하나를 소환해냈다.이 책을 읽은 때가 2015년 새봄이 시작되던 요 무렵쯤이었다. 베스트셀러인지라 한번쯤 이름은 들어서 알고 있었고 여러 사람의 강추도 받았지만 시간 핑계만 대다가 뜻하지 않은 사고로 2주간의 병석을 확보(?)하고서야 첫 장을 넘겼다.
「눈먼 자들의 도시」
이 책을 이미 읽었다는 후배 하나는, 환자가 읽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책이라고도 했다. 노벨문학상 작가의 작품이라 그런지 술술 넘어가는 책장. 몇 장 넘기지 않고도 후배가 왜 그런 충고를 했는지 짐작이 갔다. 환자복을 입으면 기가 위축되는지 ‘내게 이런 일이 생긴다면?’ 하는 방정맞은 상상을 여러 번 하게 됐는데, 지금 생각해도 암울하고 절망스럽다. 그렇다고 호러물은 아니고 전염병 감염이 이야기의 소재다. 의학소설도 물론 아니다.
소설의 초반엔, 눈이 갑자기 멀고 그것이 아주 쉽게 전염된다는 상황이 공포스러웠으나 책을 읽어나갈수록, 예기치 못했던 위기상황에서 인간이 어디까지 몰염치해지고 야비해지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암울하고 절망적이었다.
소설에서는 최초 전파자가 확실하다. 1호 확진자는 운전 중 신호대기 상태에서 눈이 멀었고 치료를 위해 찾아간 안과의 의사, 간호사, 함께 대기하던 손님들, 병원까지 택시를 태워준 운전사, 동행했던 아내가 모조리 감염됐다. 눈이 먼 직후 그에게 호의를 베푼( 척 차를 훔친) 남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정한 거리 내에만 있으면 모조리 감염이다. 길을 걷다 갑자기 눈이 멀기도 하는 것을 보면 병의 발현까지는 불규칙하지만 보균 기간이라는 게 있는 것 같다. 어쨌든 공기를 통해 감염되는 셈이니 코로나19보다 더 무섭다고 볼 수 있다. 유독 단 한 사람, 안과의사의 아내는 밀접 접촉자였음에도 홀로 감염되지 않았다. 긴장감있게 상황을 묘사할 관찰자 하나를 남겨둔 소설 작법상의 설정으로 이해된다. 작가는 포르투갈 사람이지만 소설에서는 국가에 대한 언급이나 지역에 대한 묘사가 없다. 장소만이 아니라 등장인물도 이름이 없다. 의사의 아내,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 검은 안대를 한 노인 등으로 지칭될 뿐이다. 부정(不定)대명사가 그렇듯, 장소나 사람을 특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느 장소 어떤 사람도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복선일 것이다. 이 작가의 문학세계이기도 한 초자연성, 더 구체적으로 마술적 리얼리즘의 한 요소로 볼 수도 있겠다.
듣도 보도 못한 전염병이 번지고 있다는 상황을 인지했을 때, 정부의 대책은 무조건적인 격리였다. 예전에 쓰던 정신병원 병동에 감염자들을 가두고 병원 입구는 총을 든 군인들이 지킨다. 무단 이탈자에게는 발포한다. 다만, 보급품은 넣어준다. 음식물과 휴지, 세제 등이며, 눈이 먼 안과의사가 강력히 요청했던 의료품은 끝내 보급되지 않는다.
치료 대책은 없다. 소설 속에서는 이들을 재소자로 지칭하면서 정부 대책을 이렇게 표현한다. ‘콜레라나 황열병이 창궐하던 시절, 전염병을 싣고 있거나 싣고 있다고 의심되는 배들은 항구에 들어오지 못하고 먼 바다에 사십 일 동안 그대로 있어야 했던 시절부터 내려오는 오래된 방법을 따르자는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이웃 어떤 나라의 큰 배 하나가 항구에 정박해있는 모습이 그려진다.
폭력, 약탈, 착복, 사망 사고 등 혼돈의 과도기를 거치며 불행을 공유하는 연대의식이랄까, 자율적인 질서가 자리잡혀가던 무렵 신규 재소자가 무더기로 들어왔는데 그 중에는 눈 먼 자들만의 격리된 공간 속에서도 권력을 탐하는 무리들이 섞여 있었다.
견물생심. 위기를 보면 기회 포착의 본능부터 솟는 것은 비단 1979년 12월 12일의 일만은 아니었다. 먼저 온 재소자들에게 자신들이 총을 지녔음을 인지시킨 뒤부터 음식을 통제하고 음식값으로 돈이나 귀중품을 거두어 가고 심지어 성상납 형식의 집단 강간까지 자행한다.
총 한 자루로 유지되던 비뚤어진 권력은 불붙은 병원 건물과 함께 소각되고 눈 먼 자들은 마침내 격리해제(?)의 감격을 맞지만, 그들이 마주하게 된 도시의 거리는 어쩌면 격리 병동보다 더 암울한 듯하다. 눈 먼 전염병은 온 도시를 완전히 감염시켰다. 군인들의 제지 없이 병원을 탈출할 수 있었던 것도 보초를 서는 병력이 모조리 감염된 덕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도시는 폐허가 됐다. 이 무시무시한 감염병이 사람과 사람을 타고 전염된다면 인류는 대책 없는 멸종이다. 치료약 개발에 대한 희망도 없다. 약을 개발할 사람도 눈이 멀었으니.
이제 어떻게 살지? 과연 이 혼돈의 끝은 있을까? 모두가 눈이 먼 세상에서 우린 어떻게 죽어갈까? 최후의 1인은 아마도 굶어서 죽겠지.
‘시간은 종말에 이르고 있어요. 부패는 널리 퍼지고 병은 열린 문을 찾고 물은 바닥이 나고 음식은 독이 되고 있어요. 홀로 눈이 멀지 않은 의사의 아내가 말했다.’
이 대목은 지금의 내 처지에 비춰 더욱 크게 다가온다. 월급 받는 신분으로, 5년 전 병원 침대에서 읽던 때와는 조금은 결이 다른 공감이랄까?
‘어떻게 버티지? 5월쯤이면 끝이 날까? 그 후에도 나는 해오던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눈이 보여요.’
‘저도요.’
홍서범의 노랫말마따나, 올 때 그냥 그렇게 오셨던 것처럼 갈 때도 그렇게… 전염병이 물러갔다. 감염 원인에 대해서는 끝내 언급이 없다.
5년 전 병원 침대에서 읽던 때는 이 대목에서 피식 웃었다. ‘소설을 쓰는구나!’
지금 상황에서는 소설의 결말이 곧 희망이다. 이 난리도 어느 날 득달같이 물러갈 것이라는 희망.
병은 물러가고 일상은 천천히 회복되겠지만 예전이 그대로 복원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선 종교를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에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있을 것이며 이른바 ‘사회적 거리두기’의 여파가 한국인의 독특한 대인 접촉과 유흥 문화(일명 사회생활), 그에 따른 가족 관계에도 새로운 질서를 만들 것이다. 요지부동일 것 같은 지역차별에도 긍정적인 인식 변화가 있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예측해본다.
한국사회의 최고 난제(라고 확신하는) ‘입시’에도 긍정적인 변화가 있을 수 있다면, 그건 가장 바람직한 새옹지마가 될 것이다.
이런 거대담론(?) 말고 개인적인 작은 소망이라면 역병이 지나간 심적 후유증을 여행과 답사로 위무할 수 있는 소중한 역할이 그때에도 여전히 내게 있어주기를.
정보 하나 추가요.
동명의 영화로도 상영됐다. 주인공 격인 의사의 아내 역은 줄리안 무어가 맡았고 그보다 조금 비중이 낮은 주인공, 안과의사 역은 헐크가 맡았다. 마크 러팔로가 어벤저스의 헐크 역으로 유명해지기 몇 년 전이다. 대체로 소설의 내용이 그대로 스크린으로 옮겨졌다.
책의 묘사대로라면 복도가 발을 디딜 수 없을 정도로 오물천지여야 하는데 영화에서는 그 정도의 난장판은 표현하지 못했다. 더구나 수십일 동안 머리를 못 감고 옷도 못 갈아입은 채 여기저기 똥칠갑을 해댄 사람들의 몰골은 더더욱 아니었다. 아마도 우리의 봉테일이었다면 절대로 이렇게 놔두진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의 후속편과도 같은「눈뜬 자들의 도시」역시 시간 핑계만 대고 아직 못 읽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 덕에 이번엔 병석이 아닌 책상에 앉아 차분히 읽을 수 있겠다. 글 올리기 조금 전 바로 책 주문했다. 한일우익근대사완전정복도 함께 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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