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의 창(네이버 연재)

태백산맥문학관

kocopy 2025. 3. 31. 13:39

소설「태백산맥」은 대하소설의 대명사다. 소설의 분량만 해도 200자 원고지 기준 16,500매, 말 그대로 장편을 넘어 큰강(大河)이라고 할 만한 규모의 소설집(10권 1질)이다. 규모도 규모려니와 다양한 인간 군상의 묘사를 통하여 한 시대의 양상을 드러내는 작업이므로 비록 픽션이지만 때로는 역사 서술 이상의 가치를 평가받기도 한다. 도도한 역사의 전개를 흔히 유장한 대하의 흐름에 비유하는 것과도 맥이 닿아있다.
그런 조사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하역사소설이라는 타이틀에 부합하는 우리나라의 작품을 꼽으라면 많은 사람들이 주저 없이 「태백산맥과「토지」정도를 찾을 것이다.

태백산맥문학관이 자리한 전남 보성군 벌교읍은 소설 태백산맥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중심 장소이다.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살아온 마을이자 주요 사건이 전개되는 주 무대가 바로 이곳 벌교 일대이다.

월간「현대문학」에 연재를 시작할 당시부터 이미 베스트셀러를 예감했던 태백산맥은 소설의 기록적인 인기를 거쳐 이제 우리 시대의 고전이 되었다. 태백산맥은 250쇄를 찍으며 천만 부가 팔렸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이름이 거론될 정도의 영예와 함께 막대한 인세 수입까지 얻게 해 줬지만 태백산맥이 작가에게 훈장과 통장만 안겨준 것은 아니었다. 영광에 못지않을 만큼의 시련도 있었다. 아직 봄을 말할 수 없었던 엄혹한 시기에 우리 사회 최대의 금기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소설이 인기를 얻는 것과 거의 동시에 시작된 이적표현물 시비는 지난 1994년에 8개의 단체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작가를 고발하는 것으로 정점을 찍었다. 소설 속에서 벌교에 진주한 토벌대장 임만수의 입을 빌리자면,


“당신은 매타작 정도로는 안 되겠어. 빨갱이를 그리 감싸고도는 정신 상태가 바로 빨갱인데, 콩밥을 좀 먹어야겠어.”


이 말은 조정래와 태백산맥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 상당수 주류의 시각과 정확히 일치한다. 강산이 한번 바뀌고 정권이 두 번 바뀐 11년 만의 판결은 무혐의였다. 하지만 거듭되는 테러와 살해 협박으로 인해 조정래는 여전히 집필 공간을 갖춘 단독주택에는 살 수도 없다고 한다.

 

이 박물관의 건물부터가 하나의 전시물이다. 어둠에 묻혔던 우리 현대사의 아픔과 갈등을 들춰내고 치유한다는 뜻을 담아, 언덕을 파내려간 10m 아래에 박물관을 짓고 건물 위로는 멀리서도 보이는 비스듬한 유리탑을 올렸다. 설계자 김원의 말을 빌리면 ‘해원(解冤)의 굿판’이다. 전시관 내부에서는 해방 후 민족이 갈라지고 전쟁을 거쳐 분단이 고착화되는 이 시기를 민족사의 매몰시대로 보고 기둥 없이 공중에 매달린 전시 공간의 형태로 표현하기도 했다.

태백산맥문학관 전경
기둥을 쓰지 않고 천장에 매달아 놓은 2층 전시실

1층의 1전시실은 소설 태백산맥을, 2층의 2전시실은 작가 조정래를 연출했다. 1전시실에서는 작품의 집필동기와 작품 구상, 자료 조사, 집필과 출간 과정, 작품의 내용, 평가 및 위상의 순으로 일련 전시하면서 끝부분에 이적성 논란에서 무혐의 처분까지 11년간의 과정을 관련 자료와 함께 전시했다.
2전시실에서는 작가 조정래의 삶과 문학 세계를 살피면서 가족과 독자들이 기증한 필사본을 전시해 놓았다.

1전시실의 각 전시 코너
시각적인 전달력 면에서 보자면 태백산맥문학관의 하이라이트는 이곳이다. 16,500매 육필 원고가 성인 남성의 보통키를 넘어선다.

박물관을 나서면 벌교천 양 옆으로 자리한 거리 전체가「태백산맥」답삿길이다. 박물관 바로 앞의 소화의 집, 현부자네 집을 비롯하여 벌교천 상류로부터 홍교(횡갯다리), 부용교(소화다리), 철다리 등 소설 속에 묘사된 3개의 다리가 놓여 있으며 김범우의 집, 옛 자애병원 건물, 청년단 자리, 벌교금융조합, 옛 북국민학교, 남국민학교, 보성여관, 옛 술도가 건물, 벌교역 등 소설의 무대가 길 따라 펼쳐진다.

10권에 이르는 긴 이야기는 이 집을 찾아가는 장면 묘사에서 시작된다. 정하섭이 어둠을 틈타 찾아든 ‘소화의 집’과 그곳에서 바라본 ‘현부자네 집’
소설 속 묘사처럼 현부자네 집은 한옥 기본 양식에 일본풍의 누각을 얹었으며, 한옥과는 어울리지 않는 왜색 정원을 꾸며놓았다.
일제강점기 1931년 소화(昭和) 6년에 세워져 지금까지도 소화다리로 불리는 부용교
소화다리 아래 벌교천에는 소설 속 그때의 모습처럼 갈대가 무성하다. 살벌한 이념 대립 속에 수많은 시체가 갈대밭에 널려있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허니 널렸는디. 아이고메 인자 징혀서 더 못 보겠구만이라…… 사람 쥑이는 거 날이 날마동 보자니께 환장 허겄구만요.’

소설 속에는 선암사(仙巖寺)가 자주 나온다. 그리고 부인을 얻어 가정을 이룬 대처승 이야기도 꽤 여러 번 언급된다. 소설의 모티브는 결국 작가 자신이라고 했던가? 저자 조정래의 아버지가 바로 선암사 대처승이었다. 소설에는 또 선암사 부주지를 지낸 대처승 법일 스님(송 선생)이 사찰의 땅을 소작인들에게 나눠주려다 곤욕을 치르는 것으로 묘사돼 있는데, 바로 조 작가 아버지의 신분 및 행적과 일치한다.
소설은 창작이지만 이처럼 자신이 보고 듣고 겪은 것이 근본 토대가 된다. 조정래는 순천(당시엔 승주) 선암사에서 태어나 자랐고 한국전쟁 휴전 직후 어린 시절 3년을 벌교에서 보냈기에 살벌한 이념 대립의 바로 그 시기, 바로 그 현장을 어린 눈과 귀로 똑똑히 보고 들었을 것이다.

소설의 무대로 여러 차례 등장하는 태고총림 조계산 선암사
선암사 승선교에서 바라본 강선루

여담이지만 이 소설이 요즘 발표됐더라면 아마도「태백산맥」이 아닌 다른 제목을 붙였을 거라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태백산맥을 포함한 산맥 개념은, 한반도를 대륙과 마주한 토끼 형상이라고 주장했던 일본인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 1856~1935)가 당시 조선의 지질구조를 답사한 후 쓰기 시작한 용어로서 발과 눈으로 실감할 수 있는 지리적이고 인문학적인 지형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강으로 끊기지 않고 산줄기가 이어진 개념을 찾는다면 요즘은 백두대간이라야 맞다.
소설에서 비극의 배경은 분단과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이며 이것의 더 깊은 연원은 일제에게 강점당했던 식민지의 역사라고 말하면서 정작 소설의 제목에는 식민지의 유산을 담고 있는 셈이다. 한반도의 등뼈를 이루는 태백산맥은 분단과 대립을 극복하고 함께 살아야 할 우리 민족을 상징한다고 소개돼 있는데, 소설을 쓸 당시에는 백두대간이라는 개념이 너무나 생소했으므로 작가를 탓할 수는 없겠지만 소설의 내용에 비추어 보자면 결과적으로 아이러니컬한 것은 사실이다.
여기에 대한 보완이었을까? 박물관 북측 옹벽의 이름은 ‘백두대간의 염원’이다. 우리 민족이 겪은 질곡의 역사를 극복하고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분단의 아픔을 종식하는 통일의 간구를 고구려 고분벽화의 모자이크 기법으로 표현하면서 지리산부터 백두산까지 4만여 개의 오방색 몽돌을 채집하고 하나하나에 민족의 염원을 담아 제작했다고 한다.

한국화가 이종상 작품 ‘백두대간의 염원’. 북향의 유리 벽면을 통해 전시실 내에서 감상할 수 있다.
길이 81m, 높이 8m에 이르는 건물옹벽이자 벽화작품으로서, 작가는 옹석벽화(擁石壁畫)라고 이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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