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박물관은 이름만으로 전시 내용을 짐작할 수가 있다. 건축가 김중업의 생애와 작품세계에 관한 박물관이다. 김중업은 우리나라 1세대 건축가로서 업적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다.
박물관에 연출된 전시 내용만큼이나 관심가지고 살펴봐야 할 부분은 바로 건축물이다. 김중업건축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건물이 바로 김중업 선생 자신이 설계한 작품이다.
박물관 건축물을 포함한 전체 공원 부지는 2006년까지 ㈜유유산업(현 유유제약) 안양공장이었다. 유유산업은 충북 제천으로 이전했고 이 땅을 사들인 안양시는 공장터를 박물관이 포함된 시민문화공간으로 조성했다. 김중업이 설계한 건물 중에 4개 동을 김중업건축박물관과 안양박물관, 교육관, 특별전시관으로 리모델링하여 운영하고 있다.
박물관 건물과 전시 내용을 먼저 살펴보고 故 김중업 건축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같은 공원 내에 있는 안양박물관도 간단히 둘러보겠다.
흰색 벽면에 붉은 벽돌이 매입된 2층짜리 네모난 건물이 김중업건축박물관이다. 건물에 대해 평할 만한 내공이 못 되는지라 박물관에 적힌 소개글을 그대로 인용하겠다.
‘1959년에 설계한 초기작품으로 건물의 구조체계를 노출시켜 조형적인 효과를 거두려는 의도가 잘 나타나 있다. 박스형의 건물에서 구조체계와 그 속에 채워진 벽은 재료에 의해 시각적으로 분리된다. 자유로운 입면과 평면의 추구로 건물을 지탱하는 구조체는 다양한 형태와 공간의 조작이 가능하다. 건물 측면으로 돌출된 기둥과 들보는 건물 내력벽의 의미를 없게 하므로 벽체는 유리로 처리되어 건물의 투명성과 개방성을 높인다. 단순하고 간단한 기능은 건물의 명쾌한 구조체계와 벽면분할로 높은 작품성을 지닌다.’
전부 다 이해하지는 못하겠고, 측면으로 돌출된 기둥으로 인해 조형성이 강조되고 유리 벽면 처리가 가능해졌다는 뜻으로 읽힌다. 알 듯 모를 듯,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온전히 이해하기엔 건축의 세계는 참으로 심오하다.
하지만 이런 심오한 말들을 이해 못한다고 해서 위축될 필요는 없다. 눈에 보이는 전시 공간 자체를 보이는 그대로 즐기는 것만으로도 김중업건축박물관을 찾아갈 이유는 충분하다.
박물관의 1층에서는 김중업이라는 건축가와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한 개괄을 접할 수 있고 2층에서는 각 테마별로 김중업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모형과 도면, 스케치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공간은 전체적으로 흰색 계열의 밝고 차분한 분위기를 전달한다. 벽면, 천장은 물론 기둥까지 흰색이다. 특히나 인상적인 것은 예전 공장 사무실일 때 만들어놓은 창문이 그대로 있어서 외부 빛이 직접 유입된다는 점이다. <박물관의 창> 시리즈를 통해 여러 번 언급했듯 나는 자연광이 유입되는 전시공간을 대단히 선호한다. 그래서 이 박물관도 좋아한다.
빛이 그대로 실내에 닿는 것은 아니고 흰색 버티칼로 1차 차단된다. 바닥은 이와 대비되는 어두운 무채색의 우레탄으로 마감했다.
김중업이라는 건축가에 대한 소개로부터 전시가 시작된다. 건축가 김중업(1922~1988)은 평양에서 태어나 프랑스에 활동하다 귀국하여 우리나라 1세대 건축가로서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김중업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이다. 상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회화의 피카소나 영화의 히치콕 같은 위상을 지닌, 건축 분야의 대표적인 인물 정도로 짐작된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르 코르뷔지에 건축・도시계획연구소에서 4년 가까이 일하며 배우며 그의 애제자이자 동료가 되었다고 한다. 김중업의 건축 약력을 이야기할 때 르 코르뷔지에의 영향 아래 있던 전기와 그 영향을 벗어나 김중업만의 작품세계가 펼쳐진 후기로 나눌 정도로 그에게는 일종의 기준점과도 같은 인물이다.
이 내용을 포함하여 작가의 작업노트, 수첩, 작업도구(펜, 자), 스케치 도면, 작품집 등이 전시돼 있다.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면 김중업의 각 작품별 전시 코너가 마련돼 있다. 사무실로 사용하던 당시에 구획한 공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일부 벽체만 재구성하고 출입문을 없앤 채 출입구는 열어놓았다.
문의 높이가 1800 정도라서 키 큰 사람들은 전시실로 들어설 때 고개를 숙여야 한다. 이 건물을 만들 당시엔 아마도 저 정도 높이라면 출입에 아무 지장이 없었나보다.
전시기획자가 밝힌 박물관의 컨셉은 ‘김중업의 손짓’이다. 빛의 손짓(빛의 리듬을 노래하다), 그리움의 손짓(전통의 마음으로 현재를 채우다), 소통의 손짓(자연의 노래로 인간과 속삭이다)은 김중업의 건축을 규정하는 세 가지 가치관, 즉 ‘빛의 활용’, ‘한국 전통의 건축 정신’, ‘자연과 소통하는 공간’을 손짓이라는 건축 행위를 기준으로 재정렬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김중업의 작품 세계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바로 빛이다. 여기서 또 박물관의 소개를 인용해본다.
김중업의 건축은 빛을 공간으로 끌어들이는 것에 있어서 합리성을 바탕으로 한 낭만적인 건축언어의 절제 과정을 통해 하나의 미니멀한 작품으로 표현되고 있다. 자연에 담긴 부정형의 아름다움을 밝음과 어둠의 교차를 통해 하나의 리듬감 있는 빛의 손짓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각 공간은 그의 대표작품별로 구성해놓았다. 주한 프랑스대사관(1961), 서강대학교 본관(1959), 삼일빌딩(1969), 외환은행 본점(1974), 부산유엔묘지 정문(1966), 제주대학 본관(1964), 서산부인과(1965), 서울올림픽 평화의 문(1988) 등이다. 대부분은 지금도 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김중업의 약력을 얘기할 때 공백기라는 기간이 나온다. 1971년부터 1978년까지 국내에서 강제추방되어 프랑스와 미국에 머물러 있던 기간을 말한다.
김중업은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을 건축가의 입장에서 대단히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것이 실질적인 추방 이유이고 표면적으로는 성남시(당시는 광주)의 개발 정책을 공개 비판했다가 1971년 11월에 3개월 여권으로 프랑스로 출국 당했고 이 기간은 만으로 7년을 채우게 된다. 이때 김중업건축연구소는 세무조사를 받아 엄청난 세금을 물은 뒤 문을 닫고 만다.
이른바 ‘해외 체류 반체제 인사’가 된 셈인데 사실 김중업은 탁월한 예술가이자 건축가이지 시대와 불화하는 반골은 아니었다. 정부정책에 대해서는 어떤 분야의 비판도 불허했던 시절이 있었고 이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이없게도 반체제 인사로 낙인 찍혔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김중업건축박물관을 나서면 정면 약간 우측 편으로 안양박물관이 보인다. 선사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안양의 역사를 유물과 설명패널, 영상, 모형으로 소개하고 있는 보통의 시립박물관이다. 박물관에는 안양사 발굴 유구의 축소 모형을 비롯하여 안양사 터에서 출토된 막새, 기와, 청자, 벽돌, 치미 등 수많은 발굴 유물이 전시돼 있다. 전시 내용에 따르면 안양사 경내에 있던 7층짜리 거대한 전탑이 와르르 무너져버린 순서(벽돌⇨기와⇨벽돌⇨기와) 그대로 발굴됐다고 한다.
상상의 촉이 서지 않는가? 그 거대한 벽돌탑이 젠가 무너지듯이 와르르 무너져 그대로 땅속에 묻혔다는 것이다. 큰 규모의 지진 혹은 그에 맞먹는 파괴력을 지닌 어떤 격변이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겠는가? 대단히 다이내믹한 스토리가 숨겨져 있음이 분명한데 전말을 짐작조차 할 수 없으니 더더욱 흥미롭다.
안양이라는 도시명도 이 안양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박물관이 있는 이 땅은 예전 안양사라는 대가람이 있던 장소다. 안양사 이전에 중초사가 있었고 오랫동안 안양사가 흥했다가 없어진 폐사지 위에 수목이 자라났고 어느 때부턴가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안양 포도가 재배되다가 산업화시대 이후 50년간 공장이 있었고 공장이 떠나간 자리에 문화공간이 조성됐다.
유유산업이 충북 진천으로 떠난 후 2009년 매장문화재 발굴조사가 있었는데 안양사를 포함한 그 이전과 이후 통일신라-고려-조선으로 중첩된 문화재 층위가 발견된 것이다. 안양시에서는 공장 건물 중 한 곳을 김중업건축박물관으로 조성하고 규모가 큰 다른 한 곳에는 평촌에 있던 안양역사관을 옮겨와 안양박물관으로 개관했다. 그리고 공장 부지의 많은 부분은 옛 건축 부재(주춧돌)가 배치된 야외 박물관으로 조성했다.
아마도 옛 안양사의 유물이 발굴되지 않았다면 이곳은 나무가 우거지고 연못이 놓인 자연휴식공원이 되었거나 시간이 더 지난 후에 아파트가 되었을 것이다.
박물관의 터에도 제짝이 있다면, 안양사가 있었고 유유산업이 있었던 이 자리는 김중업건축박물관과 안양박물관을 위한 더할 수 없는 제 자리인 셈이다.
김중업 건축가의 노트에 적힌 메모 한 구절을 소개하면서 글을 마친다.
살고 싶어져야 하잖은가
꿈이 있고 시가 있고
사람들이 옹기종기 정다웁게
모여 살고 싶어져야 하잖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