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무렵 사례조사차 미국으로 출장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당시 국립김해박물관 어린이박물관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도입할 시설의 벤치마킹 목적이었다. LA, 시카고, 보스턴, 뉴욕 등 미국 내의 어린이박물관 여러 곳을 답사하면서 신선함과 절망감을 동시에 느꼈다.
“맞다! 어린이박물관이라면 모름지기 직접 묻히고 뒹굴 수 있는 시설이어야지!”
“그런데 우리나라에도 이런 컨셉의 어린이박물관 도입이 가능할까?”
불가능했다. 도매금으로 싸잡아버리기엔 좀 미안한 구석이 있지만 대체로 한국의 어린이박물관에게는 아이들의 즐거움보다 관리의 안정성이 더 중요했다.
아이들 손과 얼굴에 흙이 묻으면 부모들이 싫어해요.
혹시 물이라도 뒤집어써봐, 뒤처리를 누가 해?
이렇게 여러 조각으로 된 전시물은 분실이 많아서 곤란하다니까!
몇 명만 뽑아서 대표로 체험하게 하고 나머지 아이들은 관람하도록 합시다. 간접체험이지!
무엇보다 전시의 내용은 ‘교과와 연계된 체험학습’이어야 했다. 적어도 국공립 어린이박물관의 경우는 분명 그랬다.
우리나라의 어린이박물관은 전용 시설로 지은 곳보다 대규모 국공립박물관의 부속 시설인 경우가 더 많다. 국립민속박물관, 전쟁기념관, 국립중앙박물관과 지방 분관 등 대체로 규모가 큰 국립박물관에서 전시 내용을 어린이들에게 쉽게 전달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중앙박물관과 지방 분관에는 역사 이야기와 발굴 체험 코너 등이 있고 전쟁기념관은 전쟁 역사 탐험, 나라를 잃은 슬픔 등 코너 명으로도 짐작되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고 민속박물관에는 전래 동화를 기반으로 하는 이야기 코너가 구성돼 있다. 이밖에 지자체 단위의 공립 박물관도 대체로 작은 규모의 어린이박물관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국공립 부설 이외에는 사립 어린이박물관이 있는데 사립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예약제이다. 관람료가 상대적으로 비싸다. 전시 대상은 수리, 과학 등 주로 이과 계통 교과 내용이다. 등등
사립 어린이박물관의 대표는 서울 잠실의 삼성어린이박물관이었다. 철저한 예약제 운영, 입장객 제한, 동반 부모를 위한 편의 시설 확보, 충분한 숫자의 운영요원 등 앞서가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입장요금도 상대적으로 비쌌지만 자리는 늘 만석이었다. 체험대상자인 어린이의 요금이 동반 보호자의 요금보다 비쌌던 것도 당시로서는 특이했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운영수지 면에서는 늘 적자였다는 점.
적자에 따른 부담 때문이었는지 삼성어린이박물관은 지난 2013년 5월 28일에 문을 닫았다. 박물관 측에서는 ‘서울 상상나라’라는 전시 시설의 위탁운영자로 선정되면서부터 두 곳을 함께 운영할 수가 없어서 한 곳을 포기한 것이라고 폐관의 이유를 말한다. 참고로 서울 상상나라는 서울시에서 능동 어린이대공원 내에 운영하는 공립 어린이박물관이다.
박물관이 밝힌 폐관 이유를 그대로 믿기보다는 적자 누적으로 운영을 포기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더 많았다. 삼성 같은 대기업은 사회의 압력과 기업 이미지 때문에 박물관 운영을 하고는 있지만 언제든 그만 둘 명분만을 찾고 있었는데, 바로 그 명분이 생겼다는 식의 이야기들이었다.
사실, 박물관 관람료 가지고는 학예사 인건비와 전시 시설 유지비도 충당하기 어렵다는 것은 박물관 관계자라면 누구나 다 아는 비밀 아닌 비밀이다. 그래서 어린이박물관은 국공립이 많다.
김해어린이박물관 이후 웬일인지 어린이박물관과는 업무상의 인연이 닿지 않았다. 그러던 지난 봄 무렵 고양어린이박물관엘 가 볼 기회가 생겼다.
고양어린이박물관은 일단 규모가 크다. 전시 구성이 시원시원하고 체험할 아이템도 많다. 무엇보다도 운영자 중심이 아닌 체험자 중심으로 시설을 구성했다는 점이 곳곳에서 감지되는데 지난 10여 년간 어린이박물관이 변화해 온 모습을 한 번에 확인하는 것 같아 당황스러우면서도 신선했다.
수유실, 유모차・휠체어 대여실 등 너무나 당연한 시설이 마련돼 있는 것도 새삼 반가웠다.
전체 전시 구성 면에서 보자면, 전시체험 대상의 폭이 무척이나 넓어진 점이 인상적이다. 자연생태·도시환경·생활안전·문화예술·인문사회는 물론 인권까지도 전시의 대상이다. 주로 과학과 역사 영역의 체험 학습 위주였던 예전의 어린이박물관이 아니다. 이 박물관의 모토처럼 세상의 다양하고 아름다운 문화와 가치를 놀이와 체험으로 즐기며 배우는 놀이마당이라고나 할까?
건물 1층을 들어서면 중앙에 커다란 체험 조형물이 눈에 띈다. ‘숲’을 모티브로 하는 박물관답게 1층에서 3층까지 건물 전체를 관통하는 나무 형상의 대형 구조물이다. 수평으로 놓인 나뭇잎을 디딤돌 삼아 아래위로 오르락내리락할 수 있는 신체활동형 놀이기구로서 이름은 아이그루이다.
가장 관심이 가는 전시는 인권체험 코너. 도대체 인권을 어떻게 체험하도록 꾸몄을까? 결론은 ‘그러면 그렇지!’였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상대방에게 상처 주는 행동을 하지 말자는 내용을 설명글로 적어놓은 2차원적인 전시여서 조금은 실망했지만, 사실 따져보면 저 방법 말고는 달리 대안도 없다.
사람이 가장 많은 곳은 건축놀이터이다. 체험하는 내용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아이들은 역시 만지고 두드리고 작동이 되는 전시물을 좋아한다.
2층 야외 공간에 설치된 안개숲 놀이터도 꽤 기억에 남는 공간이다. 미로처럼 꾸며 놓은 휴게 공간 전체에 물이 안개처럼 분사된다. 입구에 비치된 연잎 모형은, 머리에 쓰면 작은 우산 기능을 한다.
지상 3개 층에 걸쳐 조성된 전시실의 층간 이동은 슬로프를 이용한다. 슬로프의 벽면도 전시에 활용하고는 있지만 그렇더라도 이동 동선이 너무 길다. 한 층을 이동하려면 계단참을 3번 만나야 한다.
단체 기준 1회 체험 시간이 150분으로 꽤 길어서 아이들은 배가 고플 수가 있다. 이때는 3층 피크닉홀을 이용하면 된다. 아이들에게는 식사도 교육인지라 피크닉홀의 이용 지침이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든다.
가정에서 준비해 온 간단한 음식물만 드실 수 있다.
피자, 햄버거, 케이크, 라면, 국, 배달 및 주문음식 반입은 금지된다.
물론 음식물은 팔지 않는다.
고양어린이박물관은 관람 소감을 남기는 전자방명록이 매우 특이하다. 화면에 내용을 입력하고 출력 버튼을 누르면 나무 형상의 조형물에서 은행 번호표 같은 나뭇잎이 아래로 떨어져 쌓인다.
9월 중순이 되면 대단히 흥미로운 전시를 만날 수 있다. 1층에 위치한 <안전을 약속해> 코너는 현재 공사 중이라 관람할 수가 없는데 이 공간에 숲을 테마로 한 최첨단 인터랙티브 미디어 시설이 들어선다고 한다.
9월 말쯤 고양어린이박물관에 한 번 더 와야 할 것 같다. 아이들 이전에 우선 내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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