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드 연재글

공주-3.

kocopy 2025. 2. 17. 09:37

공주를 대표하는 유물-'무령왕릉' 발굴을 통해 본 한국 문화야만의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학계에서는 무령왕릉의 발견을 백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세기의 발굴이라고 평가합니다.
어떤 천운이 닿았기에 일제강점기의 악랄한 문화재 도굴로부터 몸을 숨겨 1971년에야 처녀분으로 발견될 수 있었을까?
한편으론 유홍준이「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아쉬워했던 것처럼 1500년을 두고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을 조금만 더 참고계시다 나올 것이지 어쩌자고 하필이면 척박한 그 시절을 택해 세상에 나왔을까?
'척박한 그 시절'은 대체 어땠을까요?
유홍준의 책을 보면, 1971년 7월 7일부터 이틀간 당시 공주 송산리에서 펼쳐졌을 그림이 그려집니다.

장마가 시작돼 비는 퍼붓습니다, 경험해 보지 못한 엄청난 발굴에 대한 긴장으로 나는 이미 내가 아닙니다, 곁에서는 '각하'께 얼른 보여드려야 한다고 닥달하는 양반들 계십니다, 발굴장을 둘러싼 사진기자들은 이제 파파라치로밖에 안 보입니다.
김원용 당시 발굴단장(국립박물관장)은 정년퇴직하는 그날까지도 자신이 역사의 죄인이라고 토로했습니다. 그의 제자 유홍준 교수도 역사상 최고의 발굴이자 동시에 최악의 발굴이라고 평했습니다.
스승의 학설과 반대되는 연구 결과를 얻었어도 스승의 사후에나 논문을 발표한다는 보수적인 사학계에서, 스승 김원용의 발굴을 이렇게 평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정도로 아쉬움이 크다는 얘기겠지요. 3000점 가까운 유물을 이틀 만에 발굴 완료했으니 유물 수습이 아니라 보자기에 쓸어담았다고 해야 할 겁니다. 무령왕릉이 요즘 발견됐다면 과연 이런 실수는 없었을까요?

시절이 척박하기로는 지금도 만만치 않기에 드는 생각입니다.

 

2014. 11. 22. 오전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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