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을 마치고 지난주까지 각급 학교가 모두 개학을 했다. 그래서 금주에는 ‘스승’을 소재로 한 박물관을 다녀올까 한다.
어느 스승의 기념관을 찾아갈까 하다가 도산 안창호 스승님의 기념관을 다녀왔다. 안창호 선생에게는 겨레의 스승이라는 수식어가 낯설지 않다. 선생은 독립협회 활동, 신민회와 흥사단 조직, 임시정부 출범 등을 주도하면서 교육을 통해 실력을 키워 독립을 쟁취하자는 교육구국운동을 벌였다. 안창호 선생이 주도한 신민회의 설립 목적 속에 선생이 지향하는 바가 잘 나타나 있다. <봉건적 구사회사상과 관습을 혁신하고 국민을 유신케 하며 국권을 회복하여 근대적 자유문명국가를 건설한다.>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을 강조한 도산은 민족의 대동단결과 항일민족공동전선 구축을 위한 사상적 기반으로 대공주의(大公)를 주창했다. 대공주의는 私(사)는 작고 公(공)은 크다는, 공동체 우선의 가치관이다. 公을 받드는 통합의 리더십은 도산의 일생을 두고 일관돼 있지만 그것이 대공주의라는 용어로 사용된 것은 그의 나이 50이 넘은 1928년에 이르러서이다. 1928년이라면 민족주의, 민주주의, 무정부주의(아나키즘), 공산주의 등등 수많은 ism이 난립하고 독립운동세력 내부에서도 무장투쟁론, 외교독립론, 민족개조론(실력양성론)이 대립하던 시기였다. 이때 대공주의를 제창하며 민족유일당 결성운동을 추진하여 1930년 상해에서 한국 최초의 정당조직체인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게 된다. 이때의 구호가 아주 멋지다.
‘개체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개체를 위하여’
어쩐지 영문 구호가 귀에 더 익숙하다. one for all, all for one.
당시의 대공주의는 민족주의자가 중심이던 독립운동세력이 사회주의 세력을 포용하기 위해서 그들이 주창하는 ‘평등’ 가치를 적극 수용한 이른바 ‘좌클릭’이라고 할 수 있다. 평등을 이야기하면 포퓰리즘, 조금 더 심하면 빨갱이로 몰리는 요즘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념적인 포용력 면에서 한국사회는 90년 전보다 명백히 퇴보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안창호기념관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기념관은 서울 신사동 도산공원 내에 있다. 도산공원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묘소가 모셔져 있는 도심공원이다. 공원 앞쪽의 큰 도로, 즉 신사역에서 영동대교 남단까지 이어지는 길도 공원 이름을 따서 도산대로라고 부른다.
선생의 묘소는 서거 이후로 쭉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었다가 1973년, 당시에는 망우리보다 훨씬 더 시골이었던 현재의 신사동으로 이장을 했다. 이때 사람들은 알았을까? 이 땅이 상전벽해할 줄을…
도산공원을 들어서자마자 바로 오른편에 도산안창호기념관이 있다. 지상 1층, 지하 2층의 3개 층을 지닌 건물로서 지상을 높이지 않고 굳이 어렵게 지하로 파내려간 이유는 공원 내의 미관 때문인 걸로 짐작된다.
1층 로비에서 바로 보이는 오른편에 전시실이 있다. 전시실 출입구에서 바라보면 실 전체가 한눈에 조망될 정도의 아담한(50평 미만) 공간이다. 관람 동선은 시계 방향으로 돌아 나오게끔 구성되어 있다. 유물과 사진과 설명패널 위주로 연출한 단순한 듯 깔끔한 전시실이다.
전시실 첫 번째 코너는 영상실이다. 연대순에 따라 선생의 일생을 정리한 13분 41초짜리 인트로(Intro) 영상물로서 자료 사진과 애니메이션 스틸컷을 단순 편집한 가장 초보적인 형태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영상물을 끝까지 모두 보는 관람객은 ‘매우’ 드물다. 유튜브가 대세인 영상시대라지만 이렇게 단순하고 상대적으로 긴(?) 영상물은 관람객의 시선을 끝까지 잡아놓지 못한다. 시대의 추세는 분명 그렇지만 극적인 임팩트를 담아내기 힘든 내용에 한정된 제작비를 고려하면 영상물 제작자를 탓할 수만은 없어 보인다. 전시기획자의 입장에서 마땅한 해답이 없다.
전시는 선생의 업적을 일대기 순으로 나눠 일곱 코너로 구성했다. 이 중 ‘신민회 활동(1907~ )’은 별도 코너로 구성하지 않았지만, 이 글에서는 전시실 초입의 요약 연표에 준해 다음 여덟 개 코너로 재구성하며 함께 제시한다.
출생과 성장(1878~ ), 1차 도미(1902~ ), 신민회 활동(1907~ ), 2차 도미(1912~ ), 임시정부 활동(1919~), 3차 도미(1925~ ), 대독립당 운동(1927~ ), 옥고와 국내활동(1932~ ).
앞서 영상실에서 관람한 똑같은 내용을 이번엔 유물과 설명글 위주로 좀 더 상세히 살펴보는 격이다.
관람을 모두 마치는 지점에 연보가 한 번 더 나온다. 전체 전시 내용의 한 판 요약본이랄까? 본 기념관의 모든 전시 내용을 놓치지 않고 관람했다면 3회 반복 학습이 되는 셈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도산은 제1세대 미국 이민자다. 선생은 교육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자신의 학업보다는 동포들의 생활개선 지도가 더 시급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미국 내 최초의 한인 단체인 공립협회를 결성하고 초대회장에 선임된다. 아래는 공립협회의 규칙이다.
1. 밤 아홉시에 잠자리에 들 것
2. 속옷 차림으로 외출하지 말 것
3. 방을 깨끗이 정리할 것
4. 버는 돈은 저축하거나 본국으로 보낼 것
5. 차이나타운에 가서 돈을 쓰지 말 것
안 지키니까 규칙을 만드는 거다. 규칙의 이면을 보면 당시 동포들의 생활상이 보인다. 이후 공립협회는 대한인국민회로 확대 발전하게 된다.
널리 알려진 선생의 일화가 전시 내용으로 소개돼 있다.
국내 지방 각지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와 상해를 오가며 고난의 독립운동을 이어가던 선생은 1932년 4월 29일 상해에서 피체되어 국내로 호송된다. 안창호 선생은 약속을 철통같이 지킨다는 유명한 에피소드가 이때 만들어진다. 이날은 상해 홍커우공원에서 윤봉길 의사 폭탄 투척 의거가 있던 날이라 왜경들의 감시가 그 어느 때보다도 삼엄했다고 한다. 하지만 도산은 ‘약속의 크고 작음을 저울질하지 마라. 약속을 지키는 믿음이 삶의 근본이다’라며 동포 소년단에 기부금을 전달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길을 나섰다가 변을 당하고 만다. 이 일화는 몇 년 전, 약속의 힘을 믿는다는 어느 보험회사의 광고 소재로 쓰이면서 좀 더 널리 알려지게 됐다.
이상의 전시는 벽면을 따라 시대순으로 구성돼 있고, 가운데 공간에도 도산 선생의 수감사진과 함께 관련 유물이 전시돼 있다. 가운데 섬처럼 떠 있다고 해서 이런 전시 기법을 아일랜드(island) 전시라고 하는데 우리말로는 딱히 부르는 명칭이 없다. ‘도산(島山) 전시’라고 하면 어떨까? ^^
‘망망대해에 우뚝 선 섬이 되리라’
전시 내용에 따르면 1902년 미국으로 가는 뱃길에서 망망대해에 우뚝 솟은 하와이 섬의 웅장한 모습에서 자신의 미래를 보듯 자기의 호를 직접 도산(島山)이라 지었다고 한다. 도산은 당시 하와이를 일컫던 우리말이다.
“도산은 ‘교육을 통해 실력을 키워 독립을 쟁취하자’는 교육구국운동을 육십 평생을 통해 일관되게 주창하고 실천해온 겨레의 큰 스승이다.”
도산안창호기념관의 전시가 관람자에게 전달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그가 구상한 독립운동 5단계 과정을 살펴보면,
①먼저 서로 단결하여 정신력의 기반을 갖춘 후 ②교육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기르고 ③인재를 키우고 재정을 확충하여 ④이를 기반으로 정치 조직을 갖추어 독립전쟁을 치르며 ⑤최종적으로 국권광복과 조국증진을 이룬다.
先실력양성 後독립전쟁! 그래서 무장독립을 주창한 일부로부터는 개량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선생의 신념은 일관되게 교육구국이었다.
도산안창호기념관은 연출 측면에서도 살펴볼 만하다.
바닥은 니스로 번쩍번쩍 광을 낸 마루를 깔았다. 전시실에 마루 바닥이 깔리면 고급스럽고 차분한 느낌이 든다.
천장 연출이 특이하다. 측창을 통해 자연광이 유입되는데 전시물에 직접 닿지 않고 실내 조도를 높이는 역할만을 한다. 마치 한옥의 처마처럼 각도가 계산되어 간접 유입되는 자연광이다. 이게 별것 아닌 것 같아도 꽤 의미가 있는 연출이다. 웬만큼 여러 박물관을 다녀 본 사람일지라도 실내에 빛이 들어오는 창을 본 적은 거의 없을 것이다. 혹시 봤다면 다른 용도로 만든 공간(예컨대 사무실, 교실 등)을 전시실로 개조한 경우이다. 이때에도 창은 일단 막아 놓고 전시실을 꾸미는 것이 보통이다.
사실, 창을 막는 것이 전시의 정석이어야 할 이유는 없는데도 어느새 그렇게 정석이 돼버렸다. 자연 채광, 즉 햇빛은 조명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자연스러운 빛을 전달하지만 전시 측면에서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다.
먼저 유물이 훼손된다. 자연 채광은 최대 10만 룩스의 강한 빛이 유입되기 때문에 모든 전시물과 전시 시설이 자외선과 적외선의 영향을 받게 된다. 물론 돌, 도자기, 유리, 보석 등은 예외이다.
또 한 가지 약점은 일정한 밝기를 유지할 수 없다는 점이다. 계절과 시간, 일기 변화에 따라 조도와 조명 각도가 달라지기 때문에 전시물의 조명 의도를 살릴 수가 없다.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마애삼존불처럼 해가 비치는 각도에 따라 부처의 표정이 천차만별로 변하는 연출을 시도해 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아직 그런 전시관을 보지 못했다.
도산안창호기념관은 천장으로 유입되는 자연광의 느낌이 대단히 좋았던 박물관으로 기억될 것 같다. 이곳을 방문한다면 천장도 한번 올려다보면서 과연 어떤 것을 보고 간접채광의 느낌이 좋았다고 했는지 살펴보시기 바란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 본 박물관을 전에 다녀왔던 사람이라면 ‘전시실이 조금 달라졌네!’ 하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광복절을 앞둔 지난 8월 13일에 ‘도산안창호기념관 새단장 개관식’이 있었다. 새단장(리모델링) 이전과 비교하면 시설이 조금 정돈되고 깨끗해진 것일 뿐 실내 기본 구조와 전시물 배치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도 사진만 보고 바뀐 것을 알았다면 눈썰미가 대단한 분이다.
도산기념관은 시내 한 가운데 위치한, 그야말로 도심 문화시설이다. 공원 바로 입구에 있어서 찾기도 쉽고 들르기도 쉽다. 도산공원에 입장하는 분들만이라도 잊지 말고 꼭 한 번씩들 들러보시라고 권해드린다. 생활 주변의 문화 공간에 익숙한 사람이 진정한 문화인이다.
전시관 관람은 무료이고 특이하게도 일요일에 휴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