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시훈의 테마기행/2012~15년

이름도 예뻐라! 닭실마을 금당실마을

kocopy 2024. 12. 31. 14:14

깊어가는 가을녘에 예천, 안동, 봉화를 가볍게 돌아왔습니다. 이곳은 모두 안동 유교문화권이라고 하여 말씨와 풍습 등 역사지리적인 전통을 공유하는 지역입니다. 대구에 있는 경북도청이 내후년에 새로 옮겨올 곳도 안동과 예천에 걸친 자리여서 이들 지역은 앞으로 더더욱 긴밀해질 예정(?)입니다.

생일축하 풍선 ㅎㅎ

여기저기 많이도 돌아다녔지만 애들 없이 둘이만 떠나는 여행은 처음입니다. 최소한 첫애가 태어난 2002년 이후에는 그렇습니다. 살짝 겁도 납니다. '각자 묵언수행하다 오는 건 아니겠지?'

청량산 등산로 입구에서 한 컷. 사실 키 차이도 거의 없는데 이렇게 잘(?) 찍어놓으니 헌칠하고 보기 좋습니다. '무릎 위에서 잘랐으면 더 보기 좋았을 것을'

청량산 단풍이 아직 덜 들었습니다. 한 열흘 후면 절정일 거라고 합니다. 단풍하면 내장산, 설악산만 떠올리는데 청량산도 이들에 못지않은 단풍 명소입니다. 퇴계 선생이 백구(白鷗)에게 입단속을 시켰을 만큼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데(淸凉山歌) 원효, 의상, 김생, 최치원, 공민왕, 주세붕, 이황 등이 청량산에 관한 시나 유람록, 글씨를 적었거나 전설을 남겼습니다. 옛 선비들이 시나 산문을 많이 남기기로는 금강산, 지리산과 더불어 꼽을 정도이니 청량산의 역사와 전통을 짐작할 만합니다. 저도 글 한 편 남길까요? "아! 청량하다!"

 

청량산을 내려와 곧장 닭실마을로 향했습니다. 닭실은 500년 전통의 안동 권씨 집성촌입니다. 금닭이 알을 품은 금계포란형 명당으로서 택리지에서 하회, 양동, 내앞과 함께 영남 4대 길지로 꼽은 곳입니다. 지난 2006년부터 마을 입구에 안내판(아래 사진)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워낙' 글 내용이 좋아 그동안 닭실마을을 바르게 알리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2010년에도 그 자리에 있었건만 요번에 가보니 다른 시설로 교체돼 있었습니다. 마치 문화재가 철거된 듯 아쉬움이 크게 남습니다.

 

2006년에 설치된 닭실마을 안내판

"대단한 분이 쓰셨나 봅니다."

 

"예, 제가 썼거든요." ㅋㅋ

1944년 일제가 마을 앞으로 영동선을 부설하면서 철로가 금닭의 목 부위를 관통하게 됐다고 합니다. 철로는 지네로 치는데 지네와 닭은 상극이어서 그 뒤로는 닭실에서 큰 인물이 귀하다고 합니다. 닭실 가서는 이런 얘기 하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

닭실마을의 주소지는 봉화읍 유곡리입니다. 닭실을 한자로 옮기자면 십이지의 열 번째 '닭 유(酉)'를 써서 유곡리(酉谷里)가 되는데, '닭실'과 비교해 보십시오. 얼마나 멋없는 이름입니까? 더 처참한(?) 사례도 있습니다. 또다른 4대 길지, 안동 내앞마을의 주소지는 천전리(川前里)입니다. 닭실과 유곡, 내앞과 천전!
4대 길지가 고생이 많습니다.

이것저젓 미리 알아 보고 닭실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청암정에   들릅니다. 청암정의 건축미는 정자(亭子)의 고장 봉화에서도 으뜸으로 꼽습니다만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익숙한 영화나 드라마(스캔들, 음란서생, 바람의 화원, 동이, 선덕여왕)를  이곳에서 많이 찍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의 닭실마을 1번지는 좀 다릅니다. 저는 언제나 마을 입구 오른편에 있는 닭실 부녀회에 꼭 들릅니다. 닭실한과를 먹기 위해서입니다. 여러 한과가 다 맛있지만 특히 유과 맛이 끝내줍니다. '입에 단맛이 남지 않는 은은한 단맛'. 닭실유과에 바치는 저의 헌사입니다. 7칸짜리 ㄱ자 건물, 닭실 부녀회에 가시면 여러분은 두 가지에 놀랍니다. 유과 맛을 보고 한번 놀라고 부녀회원들을 보고 또 한번 놀랍니다. 여쭤보지 않았지만 부녀회 막내가 분명 환갑은 넘었을 겁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따로 노인회가 있을까?'

 

이제 숙소가 있는 예천으로 다시 갑니다. 가는 길에 영주에 잠깐 내려 단산포도(이게 또 예술입니다. 다른 기회에 한번 파보겠습니다) 한 상자 차에 실었습니다. 이때쯤이면 포도가 끝물인데 단산포도가 다른 포도보다 늦게 열리는 통에 그나마 몇 상자 남아 있었습니다.

제 블로그 맛집 카테고리를 보시면 예천의 단골식당 낙천갈비가 소개돼 있습니다. 각각 오늘 점심과 저녁을 먹은 곳입니다. 식당 이름을 클릭해보세요. 음식 얘기는 이걸로 갈음합니다.

숙소는 예천 금당실마을의 우천재입니다. 오래된 옛집에 생활 편의 시설을 약간 더한 일종의 개량형 한옥입니다. 대문 옆에 다음 카페 '우천재'를 검색하라는 알림이 있어서 집에 와 검색해보니 꽤 알찬 프로그램이 많은 집이었습니다. 유명한 이효재 씨도 다녀갔네요. 잠만 자고 나온 게 아쉽습니다. 전통 마을의 특징은 집성촌입니다. 금당실도 주민 3명 중 1명이 함양 박씨라던데, 우천재 쥔장 박정호 선생님도 함양 박씨냐고 물어볼 걸 그랬습니다.

금당실마을 우천재

우천재 마루 밑에 사람을 졸졸 따르는 강아지가 있어서 이리저리 쓰다듬다보니 이게 예삿놈이 아니었습니다. 짜잔! 그 이름, 핏불테리어! 들어보셨죠? 투견장 안에서는 늑대도 못 당한다는 Ultimate 투견, 핏불테리어. 분명히 사진 찍은 거 같은데 어디 가고 없네요. 다 자라고 만나면 꽤 '후덜덜'이겠죠? 아! 고놈 보고싶다!

제가 2005년경에 근처 용문사 성보박물관으로 출장을 몇 번 왔었습니다. 당시 들렀던 이 마을에는 사람의 온기가 없는 퇴락한 고가가 많았었는데 그 뒤에 일제히 손을 본 모양입니다. 집과 길이 깨끗해지고 골목골목이 돌담, 흙담과 예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 보기 좋았습니다. 다만 너무 반듯하고 깨끗해서 민속촌 같은 느낌은 좀 아쉽습니다.

금당실의 별칭이 반서울이랍니다. 조선을 건국했을 때 이곳(+맛질)에 도읍을 정하려고 했다가 앞쪽으로 큰 물이 없어서 한강이 있는 지금의 서울로 눈길을 돌렸다고 합니다. 그러니 半서울 아니겠습니까? 더 그럴 듯한 얘기는 부산을 출발해서 금당실에 오면 서울 절반 온 거리라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학창시절 집에서 학교 갈 때 버스 갈아타려고 미아리에 내리면 절반 간 거리였는데, 그렇게 보면 미아리가 반학교였네요.

금당실은 병화가 들지 못한다는 정감록 십승지 중 한 곳입니다. 그래서 임진왜란의 화를 면한 곳이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 살기 좋고 유사시 피난 가기 좋은 곳이 십승지입니다. 금당실이란 이름도 마을길처럼 예쁜데, 야트막한 산들이 둘러친 지형이 물에 떠있는 연꽃을 닮았다고(연화부수형) 그렇게 부른답니다. 혹은 마을 앞 금곡천에서 사금이 나온다고 해서 금당곡 혹은 금곡이라 불렀다고도 합니다. 금당을 한자로 어떻게 적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금당실은 행정안전부에서 지정한 농촌정보화마을로서 농촌체험, 민속체험 등의 프로그램이 비교적 체계화된 곳입니다. 전통마을을 찾는 여행객은 날것 그대로의 옛것을 좋아하는 부류가 있고, 이해하기 쉽고 편리한 반가공 체험을 좋아하는 부류가 있습니다. 금당실마을은 후자로 보시면 됩니다.

글을 정리하면서 제일 아쉬운 건 마을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있다는 금당실송림을 못 가봤다는 점입니다. 400년 된 천연기념물 소나무숲이라는데 제대로 된 사진기 들고 출사 한번 나가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닭실, 금당실 하면서 '마을'자를 빼먹는데요, 마을 사람들의 말버릇을 따라 한 겁니다. 실이 마을이라는 뜻이니까 닭실마을은 역전앞이나 처갓집이 되는셈이라네요.

2012. 10. 14. ~ 15.